예술의 자본주의화와 내가 가고 싶은 길

나를 닮은 예술을 위하여

by 김한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책 한 권과 강신주 작가님의 영상을 몇 번 본 것으로, 매우 수박 겉핥기(심지어 무감각한 혀로 딱 한 번만 핥은 수준)로 대충 알고, 그것을 예술(음악)에 접목해 본다.


전 세계의 음악교육과 연주자 양성은 소위 ‘상품성 있는’,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왔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다른 분야의 교육과 방향성이 같다. 그렇게 옥석이 가려져 유명해지고 인정받은 솔리스트들은 누가 더 청중을 홀리고 설득하느냐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해 왔다. 어떤 감각으로든 자극을 주어야 사람들에게 뭔가 기억에 남고 그것이 돈과 경제적인 가치를 불러일으킬 테니. 내밀하고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표현을 배우는 게 아닌 보이고 들려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과도한 소리나 제스처 또는 그런 맥락의 감각들을 자극할 방향으로 연주자들을 양성하여 왔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직업을 가진 자들은 뭐든 과장되고 자극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하곤 했다. 방송이나 언론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꾼들처럼.


그러나 그러한 예술적 표현은 때로 진실성이나 진정성을 잃고 왜곡된 메시지나 감정등을 전달하기 일쑤다. 그런 표현적 스타일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성격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맞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솔리스트들은 반드시 세고 강한 이미지, 소리뿐만 아니라 성격도 으레, 응당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황제와 왕들은 화려한 옷으로 본인의 존재를 과시하나 정작 위대한 성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았다.


이를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에 빗대어도 비슷하다. 모두가 외식시장에서 ‘쓸모 있는’ ‘돈벌이가 되는’ 장사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입을 자극적으로 현혹하여 중독시키니 심심하거나 자연스러운 맛이 나는 음식들은 각광받지 못한다. 자극을 줘야 ‘맛있다’고 생각한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익숙한 요즘 세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음악이라고 다를 것인가?


그렇다면 이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인기 차트 저~멀리 바닥에 있을, 길고 장황하며 깊이 있고 맹숭맹숭한 음악은, 혹은 그러한 것들은 가치가 없는가?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이다. 아무 맛도 자극도 없는 물은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밑바탕이 되는 가장 가치가 높은 것 중 하나이다.


하나의 재료로, 혹은 최소한의 재료로 사람들을 깊이 있게 만드는 것.

억지로 꾸미지 않는 것.

이우환 작가의 작품들을 보며 그런 것을 느꼈고, 명상적인 음악을 들으며 배웠다. 가장 최근에는 임윤찬의 바흐를 들으며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표현의 폭이 넓지 않은 듯하며 억지로 뭔가를 얘기하려 하지 않는데, 분명 다이내믹 변화도 별로 없는데, 그 깊이 있는 소리나 바흐 음악의 방향성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일인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에서도 그런 비슷한 맥락이나 표현언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늘 매우 매우 긴 ‘재잘재잘’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반복적인 패시지를 연주하는 파트들이 있다.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별로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러나 매우 작은 시냇물은 결국 그 곡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되며 전체의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멜로디는 그저 척추에 의지한 갈빗대 일 뿐인.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작품이나 브람스의 작품들도 그러하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기본 모티브는 매우 단순한 하나의 음으로 4분 음표 4개를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시작의 팀파니가 연주하는 4개의 4분 음표는 그 어떤 곡의 악구보다도 깊다.


제 아무리 화려해봐야 그것의 뼈대와 뿌리는 결국 기본에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결국은 기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아가며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인간은 언제나 유동적인 존재이니 나도 당신도 언제든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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