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논산 훈련소 훈련일지 - 014

by 아론

논산 훈련소 훈련일지 - 013

꿈 없이 푹 잔 날은 오래간만이다. 모처럼 개운한 아침, 점호 후 지구 병원 방문을 위해 아침을 일찍 먹었다. 아침 메뉴는 쌀밥, 된장국, 파채섭산적, 나물, 김치, 김 정도.


오늘은 짬이 가득 찬, 훈련일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병장 교관이 인솔해 너무 늦게 도착했다. 받으려던 진료를 받지 못해 이전에 진료 이력이 있으면 가능한 물리치료만 받았다.


강도를 평소보다 올렸는데 효과가 썩 보였다. 진료는 받지 못해 다시 방문할 예정이나, 비어있는 시간에 가능한 건 해주는 게 좋겠지. 진료를 받지 못할수록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주머니에 짐이 점점 늘어난다.




바셀린, 작은 책, 공책은 필수다. 스마트폰과 이어폰이 없기에 음악을 들을 수도 없고, 글은 수기로만 가능하다. 유일한 낙은 병원의 42인치 정도 되는 TV속 아이돌들의 무대 정도.


병원에서 대기하는 동안 전날에 병원 진료를 받는다고 보고하지 않고 온 인원 때문에 잠시 소란이 있었다. 훈련소 안이지만, 실종 사고로 처리된다면 탈영처리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만큼 잠깐이지만 큰 소란이었다.


졸면서 책 읽기를 반복한다. 그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의 말년 병장은 우리를 챙겨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이 훈련도, 진료도 못 받고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복귀 후 식사를 빠르게 마쳤다. 이후 만난 부대원들은 각개전투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무척 지친 모습이었고, 나는 못 받은 만큼 다른 부대원들이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질 때 훈련받아야 한다. 예외는 없다.




병원에 자주 들르면서 느끼는 건, 여기도 나일론(?) 환자로 치부되는 인원들이 참 많다. 아프지 않아도 병원에 들러 훈련에 빠지고, 보충 훈련으로 채우는 그런. 아마 일반 훈련보다는 훈련강도가 조금 완화되었기 때문인 걸까. 조금 밉게, 그러면서 나도 내심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점심으로는 순대볶음, 깍두기, 쌀밥, 수제비국, 멸치아몬드볶음이 나왔고, 다 먹으면 누네띠네라는 과자를 2개 주는 이벤트도 진행되었다. 소소한 즐거움도 마냥 소소하지 만은 않게 느껴지는 훈련소의 디톡스는 참 놀랍다.


오후에는 못 받은 진료를 받기 위해 다시 지구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정형외과 외에 내과와 한방과를 다녀왔다. 물리치료와 함께 약침도 놓아주셔서 통증 부위의 부담이 덜어졌고 내과에서는 잦은 기침과 콧물에 축농증이 의심된다 진단받아 X-RAY도 촬영해 보았고, 경증으로 판정받았다.




내과 진료를 기다리다 내 앞 순번의 훈련병에게 진료차트를 보던 의사가 모든 훈련을 미루라고 하고 심지어 수료까지 미루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정도인가, 싶었는데 곧이어 기침할 때마다 피가 나오고 있었다.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보였고 정확한 진찰 덕분에 어서 쾌유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다들 몸상태가 참, 천차만별이다.


기다리는 동안 훈련교관과 잠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훈련소 안에 있는 서고는 책이 한정적이고 외부에서 책을 구하기도 어려운 터라 가지고 온 책 중 주고 갈 책은 어느 정도 주고 가야겠다 싶었다.


진료를 마치고 생활관에서 잠시 정신전력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조용하게 혼자 글을 쓴 게 참 오래되었다 싶어 한달음에 A4용지 1장 정도를 채웠다. 정신전력은 잠들기 전 잠시 라디오처럼 각 훈련소대, 중대마다 한 사람씩 그날의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다.


어떤 내용으로 적을까 하다, 그간 고생한 우리 분대원들의 이름과, 계속해서 챙겨주는 담당 분대장을 불러주는 게, 그나마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복귀한 분대원들과 저녁을 먹었다. 실곤약무침, 감자탕, 등심돈가스, 배추김치, 쌀밥이 나왔다. 훈련이 힘든 날은 더 든든하게 나오는 듯싶다. 바닥을 잘 긁으니 건더기가 튼실하게 나와 나름 단백질도 챙겼다.


훈련소에서 지낸 지 2주가 되는 무렵, 다른 생활관에서는 내부 분열도 조금씩 일어나고 계파가 나뉘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도둑도 있는데, 아마 원한이 쌓인 듯싶었다. 훔쳐간 물건이 생필품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받은 편지였다고 한다. 어딜 가나 적은 만들지 않도록 하자.


내일 진행될 훈련의 군장을 마치고 정신전력과 불침번이 이어졌다. 원래 예정에 없던 정신전력이라 생활관 인원들도 감동받은 분위기라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불침번도 가장 앞순번이라 중간에 깨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잠들기 전 131번 훈련병이 나와 책으로 대화를 나눈 K분대장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프지 않은데 지구병원에 오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투의 말을 했다고 하고 나에 대해서도 내가 없을 때, 병원을 쇼핑하듯 오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병원에 올 기회가 많지 않으니 다양한 진료 과목으로 받아서 빨리 쾌유하는 게 좋을 건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금 말랑말랑해 보이는 사람들을 표적 삼아 말한 듯싶었다. 그러려니 하기로 했지만, 131번 훈련병은 조금 속이 상한 모양이다.


다른 훈련병들도 조금씩 분대장으로 있는 훈련교관들과 조금씩 상처받는 일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많이 들어주고 필요한 말은 최소한으로 해야겠다고,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훈련병들을 보듬을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늘도 마무리되었다.



사진.jpg 밖에서 보는 하늘도 예쁘지만, 그때 봤던 훈련소의 하늘은 참 맑고 푸르렀다. 사진이 없는 게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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