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논산 훈련소 훈련일지 - 015

by 아론

아침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적응했다는 건, 나갈 때가 되어간다는 거겠지. 6시간 정도의 숙면 덕분에 개운했다. 아침 점호 후 식사가 이어졌다. 오늘 메뉴는 바나나, 김, 김치, 북어해장국, 쌀밥이 나왔다. 좋아하는 메뉴지만 다들 뻑뻑한 식감이 많은 메뉴라 많이들 남겼다.




운이 참 좋은 날이다. 보고가 잘못되어 오늘도 병원 진료를 가는 것으로 배정되었다. 이런 실수는 언제나 환영이지. 게다가 오늘 훈련은 모두 연병장에서 진행으로 축소되었다. 대통령 탄핵 선고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특이사항도 발생하지 않도록 특수한 날에는 훈련을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의 상황 대비하는 이유일테고, 덕분에 병원 진료로 인한 훈련공백이 없어졌다. 기분 좋았다.


오늘 교육은 포승줄 교육과 초소임무였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P 분대장이 오늘의 교관이었는데, 훈련기간이 끝나면 교관들도 휴가를 가거나 조금 여유가 생기는 덕분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텐션 높게 소리 지르고 즐겁게 교육을 마쳤다. 다들 열심히 훈련하니 쉬는 시간도 많았고 도란도란 담소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다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잠시 기강을 잡으며 분위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기도 했다. 생활관을 나올 때는 정리정돈이 깔끔히 되어있어야 하는데, 관물대가 정리되어있지 않거나 생활관이 더러운 경우가 많아 특정 생활관은 다시 들어가 정돈하기도 했다.




오전 교육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떡갈비 조림, 묵무침, 쌀밥, 소고기뭇국, 사과주스, 김치였다. 밥을 적당히 먹으려고 했는데, 밥맛이 참 좋다. 체중은 늘지 않지만 조금은 감량하고 싶었는데, 다이어트는 나가서 하기로 했다. 얼마 없는 행복의 순간을 굳이 줄이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 병원 진료를 마치고 PX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른 훈련병들이 한껏 신나 있는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났고, 전략적으로 며칠간만 먹을 음식을 사거나 오래 못 먹은 음료를 사기로 했다. 다들 잔뜩 살 것이고 무조건 남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몸이 찌뿌둥하고 훈련보다 운동이 하고 싶다. 생활관에서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갑갑하긴 하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다. 다가올 날들이 지나온 날들보다 적어졌으니.


이제 내 역할을 다들 분배해서 하고 있어 생활관 내부 기강도 잘 잡혀있다. 한참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다가 결정해야 할 부분만 집어주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어 다들 대견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곧 있을 행군에 대비해 군장을 신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척추질환이 있는 경우 대부분 가벼운 배낭만 메는 군장을 했고, 대부분 완전군장을 메었다. 늘 운동 갈 때마다 5~10kg 정도의 가방을 멨기에 완전군장도 적당하게 느껴졌지만, 최대한 군장은 낮췄다. 욕심껏 중량을 높이면 누군가를 도와주기 힘들 것 같았다.


저녁 먹기 전에 잠시 마피아 게임을 했다. 촐싹대다 금방 걸리거나 평소와 다른 모습들로 의심 사는 모습에 깔깔대고 웃으며 개인정비 시간을 보냈다.


저녁은 소고기 해장국, 가지마파덮밥, 김치, 계란과자, 쌀밥, 비요뜨가 나왔다. 장염이 살짝 생겼지만 심해지기 전에는 거르지 않고 먹기로 했다. 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배고프면 큰일이다.


잠들기 전에는 131번 훈련병과 앞으로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들 피곤했는지 금방 잠에 들었고, 늘 책을 보는 131번 훈련병과는 깊게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아 진지한 대화를 갖는 시간이 좋았다. 유일한 내 친구이기도 하고, 나와 다른 길을 걷는 친구이기에 앞으로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다.


후회와 걱정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이 친구도 고민거리로 삼고 있었다. 나도 항상 중요한 때마다 정작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시간을 보냈던 경험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우리 생활관은 다들 빠릿빠릿하게 챙겨서 트집보다는 칭찬받는 생활관에 속했다. 지나고 보니 다들 순박하고 리드해 주는 친구들도 많은 덕에 훈련소를 나가는 게 조금씩 아쉬움이 커졌다.


식사 후 연병장을 도는 시간에, 슬슬 떠나게 됨을 직감하며 다들 조금 울적해지기도 한다. 해 질 녘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기 힘들지 몰라도, 다들 잘 지내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그런 인연으로 남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오늘 139번 훈련병에게 말실수를 했다. 바로 사과를 건넸다. 골이 깊어지기 전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을 건네어, 다행히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모든 순간은 언젠가 그리워진다. 그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거니깐. 내일로 향하는 잠을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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