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훈련소 훈련일지 - 019
새벽부터 목이 많이 아팠다. 물만 마셔도 아프고, 몸이 영 안 좋다. 오늘은 지구병원 방문 일정이 없어, 의무대만 방문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진료는 받기로.
아침은 게살죽, 쌀밥, 고기조림, 망고주수, 감자채볶음, 배추김치 등이 나왔다. 밥이 잘 안 넘어갔다. 몸이 안 좋은 탓일까.
오전에는 우리가 사용했던 장구류 정리가 이어졌다. 전부 우리 물건이라 생각했던, 사실은 빌렸던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 싱숭생숭했다. 생활관 인원들에게 몸이 안 좋다 말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깜빡 졸다 일어나 강의를 들으러 이동했다.
민간 강사의 강의 시간으로, 국방전문가와 판소리꾼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북한은 주적'이라는 주제와 현재 북한의 무력 현황 및 도발 이력들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셨고 '아름다운 나라'를 판소리로 불러주시는 공연이 이어졌다. 마음속에서 애국심이 피어오르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B 중대장님의 '무엇이든 말해보세요' 시간이 이어졌다. 훈련기간 동안 다소 딱딱한, 융통성보다는 정석에 맞게 행동하도록 하셨던 중대장님인지라 불평불만이 간간히 있었고, 본인도 알고 있었음에도 쭉 자신의 스탠스를 유지해 오셨던 모양이다.
응어리를 풀기 위한 시간. 어차피 끝나가는 마당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받아줄 것이고 사과할 건 사과하되, 아닌 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중대장님 말씀에 다들 우물쭈물하다 하나, 둘 손을 들었다.
강압적으로 대해주시돼, 하면 안 되거나 이상한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격하거나 사과를 요청하는 것보단, 개인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나이, 사는 곳, 왜 군인을 직업으로 선택했는지 등등.
다양한 질문들과 답변이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심금을 울렸다. 앞으로 수료 후 연락하지 않을 생판 남일지언정, 서로 간의 최선의 예의를 다하는 게 상호 간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모두에게 최선을 다했고 우리들도 크게 사고 치거나 한 부분 없이 잘 수료해주었다는 말씀이었다.
츤데레처럼 툭툭 내뱉는 성격의 소대장님이셨기에, 직설적이면서 솔직한 말씀에 좀 더 마음이 찡하고 울렸다.
조금 특별한 점심이 이어졌는데, 카레와 짜장 중 선택이 가능한 선택식 식사였다.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선택지가 이렇게 만족스러움을 더해줄 줄은 몰랐다. 내가 선택한 카레 메뉴는 카레, 쌀밥, 소시지, 단무지 무침, 배추김치, 짜요짜요 복숭아맛이 나왔다. 밖에서는 어느 식당을 갈지 고민하는 것에 짜증 나곤 했었는데, 이 또한 배부른 투정이었구나 싶었다.
생활관 복귀 후 의무대로 향했다. 조용히 책 읽으며 대기하다, 볕도 쬐고, 한참을 졸다 진료를 받고 나왔다. 그런데 같이 간 138번 훈련병이 기분 따라 진료하는 군의관을 만나 마음이 잔뜩 상해서 돌아왔다.
의사 파업기간에 일해야 하는 것을 훈련병들에게 화풀이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처받은 138번 훈련병의 마음을 최대한 다독여주는 시간을 가졌다. 생활관에 복귀해서도 한참을 한탄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진료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으로 향하는 거구의 훈련병을 봤다. 분대장님들과 소대장님 앞에서 절뚝거리지만, 화장실이나 생활관 안에서는 잘 걸어 다니는 속 보이는 훈련병이었다.
평소 훈련에 열외를 많이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 개인정비 하며 친목을 다지거나 짐을 정리할 때 계속 보충훈련을 나가야 했다. 생활관에서도 트러블이 있었는지 생활관도 변경했다고 한다. '참 다양한 사람들과 지냈구나' 싶다.
139번 훈련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훈련이 끝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나를 책임져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상황 모두가 나에게 좋았다. 다들 이제 아쉬워하기 시작한다. 일찍부터 아쉬웠다. 그래도 아쉽다. 많이 그립겠지.
자기 전까지 이런저런 검사와 청소를 계속 시킨다. 우리가 나가면 몇 없는 분대장들이 다 해야 하는 일이기에, 약간 정에 호소하듯이 도움을 요청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다 같이 하면 금방 하는 일들이라 개운한 마음으로 도왔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며칠 전 요청했던 127번 훈련병이 찾아와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깔끔하게 잘 다듬어주어 생활관 인원들이 부러워했다. 약간 쑥스러웠다. 고마움에 포카리스웨트 분말 한 박스를 전했다.
점호를 마치고 잠시 생활관 바닥에 모여 잠시 분대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앞에서는 화도 많이 냈지만 뒤에서 남 모르게 상담도 해주고 많이 챙겨주었던 K 분대장과 C 분대장에 대한 칭찬과 함께, 서로 처음 만난 날의 첫인상을 공유하며 한참을 웃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 잠에 들었다.
이제 1번만 더 자면 이 길고 지겨웠던 훈련기간도 끝이다. 현역들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이기에 현역 병사들 모두에게 정말 마음 깊숙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 하는데 그만큼 소중한 시간들이었다는 거니까. 그리운 마음도 감사히 여기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