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여름 Jun 30. 2020

어머니의 교자상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손님이 많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면 또 어른들이 모이셨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를 가득 메운 웃음소리를 쫓아 가면 언제나 그 끝에는 활짝 열어서 말발굽으로 고정해 둔 우리 집 현관문이 있었고, 늘어진 대나무발 사이로 소란스러워 보이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은근한 불빛이 한여름의 어스름 저녁을 향해 퍼져나가는 모습은 어쩐지 취한 어른들의 웃음소리와 잘 어울렸다. 지금이야 그런 광경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그 시절 복도식 아파트는 계단식 아파트와는 다르게 시골 동네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머니는 시골집에서 마루로 드는 문을 열어두듯이 현관문을 열어두었고, 이웃들도 당연하게 여겼다. 문과 창문을 동시에 열어두면 바람이 잘 통했는데, 바람 드는 자리로 이웃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였을까. 학교에서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이웃사촌이 옛말이 되었다고 배울 때는 갸우뚱했었다. 우리 집 거실에 모이는 저 사람들은 이웃사촌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사람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손맛이 좋았던 어머니의 꿀 조합은 많은 손님들을 우리 집 거실로 이끌었다. 회사 동료나 계모임 같은 아버지의 손님, 이웃 또래애들의 어머니들이나 학급 임원 어머니들(진심 최악) 같은 어머니의 손님, 혹은 친척들. 두 분은 다른 면이 많았지만 그럴 땐 맘이 참 잘 맞았다. 8남매 중 여섯째였던 아버지와, 5남매 중 셋째였던 어머니. 자식 많은 집에서 자란 두 분에게 내 집이 생기고 그 집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건 큰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가끔은 거실이 나와 동생의 몫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들들의 생일에는 꼭 친구들을 불러 모아 손수 음식을 해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거실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벌겋게 취한 어른들의 얼굴이건 말간 아이들의 얼굴이건 그 가운데엔 교자상과 어머니의 음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자상에는 먼지 쌓일 날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접할 날이 많기도 했었지만, 쓰이지 않을 때에도 어머니가 워낙에 애지중지 보관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날 청소의 마무리는 언제나 교자상을 닦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혹여 얼룩이 질세라 행주와 마른걸레로 정성스레 닦고, 신문지로 싸서 장롱 위에 올려두었다. 안방 장롱 위에 교자상 세 개를 나란히 얹으면 빈틈 하나 보이지 않게 딱 들어맞았는데, 거긴 먼지가 내려앉을 도리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때 아파트들은 장롱과 교자상의 높이를 고려해서 천장 규격을 정해두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가끔은 별일이 없는데 상을 꺼내서 닦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속 시끄러운 날이면 라디오를 틀어두고 닦을 것도 없는 그 상을 몇 번이고 닦는 것이었다. 어딜 닦을 목적도 없이 헐겁게 쓸어내리는 그 모양새는 닦는 게 아니라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고 속앓이를 하면 배를 쓸어내려주던 그 손길처럼. 그리고 항상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라디오에서 가 나오든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엄정화의 페스티벌이었다. 이제는 웃는 거야 스마일 어게인 행복한 순간이야 해피 데이. 그 노래가 왜 그렇게 쓸쓸했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그렇게 아끼던 물건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교자상을 세 개씩이나 들여놓고 쓰는 집은 많지 않았기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 집 교자상을 빌려가곤 했다. 신문지로 곱게 각을 잡아둔 교자상을 꺼내서 빌려줄 때 어머니의 표정에는 뿌듯함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내 손에 한 개, 본인의 손에 한 개를 들어가며 이웃집에 손수 배달까지 해주었다. 이웃 아주머니가 창희가 이 큰 교자상도 든다고 의젓하다고 해주면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분명 어머니는 웃고 계셨다.


10년은 족히 썼지만 빛이 바래지도 이가 빠지지도 않았던 교자상은 어머니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집을 떠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교통사고 이후 손님들의 발길은 뚝 끊겼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야 했다. 장롱 위에 올려져 있던 상들은 장롱이 한 칸씩 줄어들 때마다 하나씩 버려졌다. 상을 내다 버리는 어머니는 생각보다 덤덤했었다. 얼마나 그 상을 아끼는지 알았기 때문에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어머니는 어쩔 수 없는 일에는 미련두지 않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하나는 끝내 지켜내셨다. 천장이 낮은 집으로 이사 가며 장롱 위에 상을 올릴 수도 없어지자, 아버지는 이제 쓸 일도 없으니 버리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다 쓸 곳이 있다며 부엌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딱 한 상에 맞게 제사상을 차렸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상을 차려놓고, 아버지와 나와 동생을 차례로 깨웠다. 바쁘게 살다 보니 할아버지의 제삿날인 것도 잊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술병을 내밀었고, 아버지는 술병을 건네받아 잔을 채웠다. 고요한 아침이었다. 절을 올리고 제사음식으로 아침을 차릴 때까지도 두 분은 아무 말이 없으셨다. 국물을 몇 차례 뜨더니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네.

고맙긴 무슨. 얼른 먹어요.


생전 고맙다는 말 할 줄 모르던 아버지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그 뒤로 또다시 말들이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날 따라 밥그릇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가 경쾌했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국민학교에 가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아버지 스스로도 결론 내리지 못했던 걸 어머니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모두 먹고 일어서는데, 아버지가 그릇을 치우고 뒷정리를 도왔다. 손사래를 치며 하던 대로 하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한사코 걸레질까지 해가며. 아버지는 교자상을 신문지로 싸서 안방으로 가져가더니, 장롱을 옆으로 살짝 밀어서 자리를 만들어 넣었두었다. 그리곤 민망했는지 담배 한 대 피러 간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안방에 들어가 엉성하게 인 교자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