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크로이드살인사건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엔 여러 등장인물이 나온다. 고고학을 하는 남편의 영향을 받아서 쓴 작품들이 많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작가,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이 나오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글을 쓰는 의사가 나온다.
자기 남편을 죽인 여자가 자살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여자가 남긴 애절한 편지. 이것을 두고 또 숨 막히는 살인이 벌어진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벌인 범죄였다.
그러나 명탐정 포와로만은 알고 있다. 증거만 못 찾았을 뿐...
소설 속의 탐정 포와로의 첫 등장은 호박을 기르는 남자로 소개된다. 조용한 시골 마을로 이사한 포와로는 정원에서 대단한 호박 하나를 키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가 은퇴를 하려고 하지만 늘 사건이 따라다니듯 아무튼 아가사 크리스티는 포와로를 결국 영원히 은퇴시키긴 한다. 나중에 <커튼>이란 작품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
마플 할머니와 포와로 탐정 둘 다 좋아하긴 하지만 그 외의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이고 독특하다. 그런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주요 인물들 중 착하지 않은 인물들이 갖고 있는 직업이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다루는 의사, 간호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상상력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닌지 소름이 끼칠 때가 많았다.
실제로 그녀는 영국 시골의 사악한 면을 보았다. 작품 배경이 도시에서가 아니라 시골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좁은 마을에서 벌어진 오싹한 살인 사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캐롤라인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무엇이든 다 알아냈다.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해내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정원 손질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열심히 민들레 뿌리를 살펴보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니 무거운 물체가 퍽 하고 땅에 튕기며 내 발 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호박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포와로를 비밀스러운 이웃인 '포로트'라는 남자라고 소개한다. ^^; 그리고 내 구미를 당기는 텃밭 이야기가 이어진다. 포와로가 텃밭에서 호박을 키우다니.. 물론 다른 소설에선 자신의 이름을 딴 장미도 소개하는 포와로가 등장하니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이어지는 포와로가 사과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정말 미안합니다. 뭐라고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몇 달 동안 호박을 길러 왔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이 호박들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나는 호박들이 마음껏 자라도록 해주었죠. 예! 마음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말입니다. 나는 가장 큰 놈을 집어 들어서 담너머로 던져버렸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군요."
셰퍼드 의사는 포와로를 보면 이런 말을 이어서 한다.
"그 이상한 작은 남자는 나의 이런 생각을 읽는 모양이었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셰퍼드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마치 그가 기록한 것들을 읽어가듯 말이다. 이 에르큘 포와로에게 사실을 감추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고 내가 당신들에게 적어도 36번은 말했을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어김없이 밝혀내고야 맙니다.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된 포와로는 웅변하듯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추리소설 작가라는 명성을 제대로 안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추리 소설임에도 자꾸 밑줄을 긋게 한다. 그녀의 소설 중에서도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일 것이다.
'새벽 5시, 무척 피곤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작업을 다 끝냈다. 너무 오랫동안 글씨를 쓴 탓인지 팔이 쑤신다. 나는 내 기록의 마지막을 이상하게 장식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포와로가 실패한 사건의 기록으로 언젠가 출판하려고 했다!'
이건 소설 속 범인이 하는 말이지만,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 자신의 하소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녀가 포와로와 힘겨루기를 하는 듯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에르큘 포와로가 일을 모두 마친 뒤에 이곳으로 와서 호박이나 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국 남자들은 호박에 관한 넋두리가 많은 듯하다. 우연히 본 넷플릭스에서 본 셜록과 왓슨에서도 호박 위로 떨어진 왓슨에피소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호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호박 이야기로 끝나는데, 그녀의 재치 넘치는 장치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범인을 알아채지 못하든 이미 알고 읽든 읽을 때마다 나는 늘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든다.
긴 연휴 동안 긴 길을 쓰고 싶었는데 할 일이 너무도 많았나 보다. 다시 출근을 하면 짧은 글을 써야 한다. 호박은 모르겠고 제비가 물고 온 박 씨가 여물어 터지듯 내 이야기도 샘솟아 나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