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두고 수집하는 것은 언젠가 꼭 쓸 일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포장비닐봉지나 뚜껑이 있는 빈병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다 쓸 곳이 생기기 때문이다.
찍은 사진을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 같은 것을 여러 번 찍은 것도 함부로 삭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새로 바꾸면서 즐거웠지만, 3개월 만에 오천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서 메모리 용량이 꽉 차 버렸다. 백업하고 다시 저장공간이 생겨도 곧 다시 채워진다. 매일 담는 양보다 버리는 양이 턱없이 작기 때문이다.
봄이 오기 전에 스마트폰 저장 공간을 확보해두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핑계가 많았다. 찍을 때처럼 지울 때도 하나씩 확인해봐야 하는데 그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백업을 해도 여전히 부족했다. 잠깐 사진 정리를 해, 간신히 700여 개를 지웠다.
연예인들의 사진앨범을 정리해주는 TV 프로그램을 얼마 전에 봤다. 나만 넘치는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 때는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30-40장이 넘어도 하나도 지우지 못했었다. 다 다른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다른 표정이 담겨있고 모든 것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꽃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정리하지 못한 비슷비슷한 사진들이 쌓여가고 있다. 사진 파일은 여전히 정리가 잘 안 된다.
사진 지우는 어려운 일을 어쩌다 4살 아이가 해낼 때도 있다. 남편이 사진 찍는 나를 위해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마련해줬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카메라와 나를 번갈아 본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4G 메모리카드에 있던 사진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눌렀는지 전체 사진 삭제나 포맷을 한 것 같았다. 너무 놀라서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꺼번에 백업하려고 미루다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여름 동안 찍은 사진이 모두 사라졌다. 그해 여름 꽃 사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때 문득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참 스토리보드 작업으로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 동료 컴퓨터가 '핑'하더니 꺼졌다. 전기가 나갔나 싶었는데 컴퓨터가 그냥 다운된 것이었다. 복구를 해보려고 했지만 하드도 망가지는 바람에 모든 문서가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정말 복구 못한데? 중요한 문서들 백업해놨어?"
말은 걸었지만 화가 났을 동료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료는 별일 아닌 듯 웃었다.
"새로 만들어야겠네. 괜찮아. 다 사라져서 중요한 게 뭔지 알 수가 없네. 하하하"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그 동료가 생각났다.나도 아이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고, 되돌릴 수도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눈팔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만 했다.
모두 사라지고 나니 무엇을 찍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덕분에 4G 메모리카드가 새로 생긴 기분이었다. 여름꽃을 싹 지웠으니 새로운 가을꽃이 저장되었다.
어느 날 사진을 하나씩 지우다 반대로 해봤다. 지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골라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정리가 쉬웠다.
뷔페에서 차려진 요리들을 둘러보고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접시 담는 기분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미련에 흔들리지 않고 쌓여버린 더미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두 눈을 감고 싹 지웠다. 잘 지우는 방법을 늘 찾고 있었는데 괜찮았다.
이사온지 몇 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짐을 풀고 있다. 막상 옮겨온 상자들을 열어 보니 당장 쓸 물건들이 아니었다. 잘 들고 다니지 않는 가방, 손목시계, 사은품으로 받은 파우치, 선물 받아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쓰지 않는 물건은 쌓여 짐 더미가 되었다. 그것들을 담은 여러 개의 상자가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잘 지우고 싶다. 너무 많은 사진도 쓰지 않는 물건들의 추억들도 말이다.
잘 지우려면 필요한 것을 골라내야 한다. 작은 미련은 버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는 것이다. 비슷한 사진들 중에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사진만 앨범에 담고 있다. 추억이 깃든 물건을 정리했다. 물건을 버려도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왠지 용감해진 기분이다. 포기를 잘해야 진짜 중요한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