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안개초

by 무쌍

다시 찾아간 꽃밭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을 듯 적막했다. 초록의 화단은 마치 가을 들녘인 듯 갈색으로 물들었고, 아직 남은 꽃이 하나둘 보일 뿐이었다.

깨끗한 새 노트를 펼친 듯 설레었던 하얀 안개초가 여름 앞에선 오래된 노트처럼 갈색이 되었다. 만히 들여다보니 른 가지마다 동글동글 방울을 달고 있었다. 바로 씨앗 주머니였다. 큰 방울 하나가 터질 듯 틈이 벌어져 있었다. 방울을 열어보니 까맣게 익은 씨가 또로롱 쏟아졌다. 손바닥 위로 어진 방울은 뒹굴며 작은 알갱이 계속 쏟아냈다.

몇 개나 될까? 새어보려고 손가락을 갖다 대려다 그만두었다. 너무 작아 손으로 만지는 순간 뭉개지며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꽃은 한송이가 피었는데 사연은 얼마나 많은지 씨앗은 열 알이 더 넘었다.

안개초 씨앗주머니와 개양귀비 씨앗

시든 꽃이 내게 말을 걸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났어요.'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다 썼으니 좀 읽어주세요.' 라며 작은 씨앗을 건네주었다. 꽃은 자신의 완성품을 남겼다. 내 노트에 쓰인 글들보다 훨씬 더 오하고 뭉클한 문장들이 들어 있었다.

지난날 작은 씨앗이 초록잎으로 자라며 만난 인연들이 누구였는지도 쓰여있겠지. 몇 번의 비를 만났고, 바람은 얼마나 불었는지, 천둥번개는 무섭지 않았는지 말이다.

꽃이 피기 직전까지 꽃 구경꾼들의 간절한 기다림의 눈빛도 설명해줄 것이다. 활짝 핀 꽃 속에서 흥분했던 탄성들도 모두 모아 두었겠지. 지친 일과를 마치고 잠시 산책을 나섰던 수많은 한숨과 눈물도 모른 척 지켜봤을 것이다.

지난 봄 안개초

내가 찾아가 사랑했던 시간은 너무 짧았지만, 안개초 씨앗이 기록한 시간은 노트 한 권이 되었다. 그 노트를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책과 노트들 사이에 꽂아 두었다. 그대로 꽂아두었다가 지루한 겨울이 지나 이른 봄에 다시 꺼내봐야지.

얼어붙은 땅이 부드럽게 만져질 때가 되면 힘이 불끈 나는 영양제를 잘 섞은 흙에 꽂아 둘 것이다. 그리고 해가 잘 드는 곳에 앉아 물 한잔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하얀 꽃잎이 필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하겠지. 그런데 빌려온 노트 한 권은 다시 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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