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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Jun 15. 2021

살구 향기는 기억한다

멀고도 가까운

 꽃을 다 떨어뜨린 나무는 초록색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 구분이 되지 않았다. 대신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게 했다. 벚나무는 검붉은 열매를 떨어뜨렸고, 매실나무 아래는 떨어진 매실이 뒹굴며 몇 알 안남고 사람들이 따갔다. 앵두나무는 오가는 사람 손에  빨갛게 익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살구꽃이 예쁘게 피었던 봄은 갔는데 살구나무가 맥을 못 추고 있다.

 무슨 일인지 살구들은 제대로 익지 않고 떨어지거나 사람들도 손대지 않는다. 비가 새 차 게 내려서 오늘따라 살구는 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살구가 아까워 상처가 덜한 몇 알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계절이 분명 여름인데 가장 찬란해야 하는 살구는 누구의 관심도 못 받는 듯 보였다.


 식탁 위에 올려둔 살구는 익어가면서 더 진한 향기를 풍겼다. 아이들도 킁킁대며 '이게 무슨 냄새야?"라고 묻는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펴지는 향기는 가족들이 오가면서 한 번씩 맡고 있다. 살구는 갖고 올 때보다 더 진한 주황이 되며 뿜는 향기가  우리에게 미소를 짓게 했다. 들고 온 살구에게 바라는 건 잠시 지나는 계절이 주는 기운을 얻고자 함이다.

살구나무아래 떨어진 살구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는 살구로 시작해서 살구로 끝 난다. 떨어진 살구를 주우며 그녀가 생각났다. 오랜만에 꺼내본 책엔 살구 사진과 함께 살구 더미와 어머니, 가족들과의 슬픔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살구 더미와 함께 한 가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최악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살구 중에서

 그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집에는 오래전 심은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집을 팔기 전에 살구를 모두 따야 했다. 어마어마한 살구는 더미처럼 쌓아둔 채 썩은 것을 고르고 지켜보며 그녀 옆에서 이야기를 쓰라고 자극했다. 어쩌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남동생이 들고 온 살구 더미를 받는 순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집을 정리하며 그녀가 마주한 어린 시절의 삶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남동생이 갖고 온 살구 더미는 눈물인 듯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글을 쓰게 했고 그녀의 삶은 살구 더미로 시작된 이야기는 살구로 끝이 난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잠을 못 잤던 기억이 난다. 그땐 잘 몰랐지만 지금은 설명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바로 살구 향기의 기억때문이었다. 살구 향기를 맡다 보니 후각 너머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분명 식탁에 놓인 살구에서 향기가 나는데, 오래전  귤 창고에 쌓인 상자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가 맡아지는 듯하다.

 귤밭을 하던 아버지가 늦은 가을 떠나버리자 과수원은 봄도 오기 전에 팔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귤 창고에 주인 없이  썩어가던 귤이 떠올랐다. 창고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던 귤 곰팡이 냄새는 머리끝까지 올라가서 울음을 멈추지 않게 했다. 그동안 내가 아는 가장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가 시시한 것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우연히 주워온 살구가 리베카 솔닛의  살구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펼치고 읽다 보니, 내 이야기를 못쓰고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귤밭 기억이 과일과 꽃 향기를 섞어놓은 살구향처럼 어렴풋이 나를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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