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서리는 꽃을 짓밟고 시작된다

자두나무

by 무쌍

꽃이 차례대로 피어나듯이 과실나무도 순서대로 익는다. 검붉은 버찌는 바닥을 뒹굴고, 앵두나무는 초록 이파리만 남았다. 살구는 아직 열매가 남았지만 떨어질 듯하다. 동네 포도나무 몇 그루를 찾았는데 동글동글 록색 포도송이 모양을 잡았다.

지금은 자두의 시간이다. 봄에 핀 꽃을 봤지만 두인 걸 몰라봤다. 초봄 하얗게 핀 꽃나무가 살구도 아닌데 매실도 아니고 뭔지 궁금했다. 나무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꽃 공부도 게을러서 꽃나무 몇 개를 구분하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열매가 맺으면 곧 알게 될 테니 궁금증은 미루고 있었다. 동그랗고 매끈한 열매가 비바람에 떨어지지도 않고 단단히 매달려 있어서 신기했다. 볼 때마다 무슨 나무인지 궁금했다. 오지랖 넓은 남자가 나무 아래를 지나며 '매실이에요'라고 알려줬지만, 내 눈엔 매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느 날 떨어진 자두 한알이 '나 자두야'라며 대답해줬다.

떨어진 자두 한알

탐스럽게 익고 있는 자두였다. 갓난아이처럼 작고 앙증맞은 엉덩이를 한 자두는 금방 좋아졌다. 날마다 과일이 익어가는 과수원 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엔 그렇게 관심도 안 가던 밀감 밭 풍경이 그려졌다. 아빠가 아끼던 자두나무는 키가 어린 나만했다. 열심히 돌봐줬지만 자두는 서너 개 정도 달렸다. 알이 크지도 않고 작은 채 익어버려 아빠는 상심이 크셨다. 주워온 자두는 마트에 나온 하우스 자두보다 더 컸다. 잘 익은 자두 한알이 손위에 떨어지면 겠다 싶어 갈 때마다 올려다봤다.

익어가던 자두와 나무앞 루드베키아꽃

자두가 익어가고 나무 아래는 수상한 발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야생초가 무성하게 올라왔었는데 풀이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누군가 풀을 자꾸만 밟은 듯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나무 앞엔 검은 눈을 한 루드베키아 꽃이 피었다. 검은눈천인국이라고 부르는 루드베키아 꽃인데 가운데 꽃술이 까맣고 선명하다. 꽃은 검은 눈동자처럼 자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만개한 꽃은 노란 등불이 되어서 길이 훤해졌다. 꽃이 피고 나니 산책 코스에 자두나무 앞을 지나는 건 빠뜨릴 수 없는 즐거운 일이었다.


행복은 달콤하고 금방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은 섭리대로 만남과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자두나무를 보러 간 내 눈엔 목이 다 꺾이고 바닥에 누워버린 꽃이 먼저 보였다. 나무를 올려다봤다. 열매는 온대 간데없고 텅 비었다. 자두 서리를 하는 발은 검은눈천인국을 짓밟으며 거칠게 시작되었나 보다.

한밤중에 벌어진 걸까? 자두만 보느라 다른 야생초들처럼 아무렇게나 짓밟으며 꽃다발처럼 핀 꽃을 망쳐버렸다. 마나 지난 걸까? 꺾인 줄기 끝엔 꽃이 아직 살아 있었다. 줄기를 하나씩 회양목 나무에 걸쳐 주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인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밝은 낮에 사다리를 갖고 와서 따갔다면 꽃은 별일이 없었겠지만 몰래한 일이 사달을 낸 듯하다. 누군지 모르지만 맛있게 자두를 먹었겠지. 아쉽지만 자두와 만남은 길지 않았다.

빈 자두나무와 백일홍꽃 @songyiflower인스타그램

이별은 쓸쓸하지만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이제 피기 시작했으니 여름 내내 더 많은 꽃을 피울 것이다. 나무 아래 백일홍 꽃밭이 서서히 고개를 올리고 있었다. 자두와의 짧은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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