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착한 텃밭

호박잎을 먹으려고 호박을 키운다

호박잎국

by 무쌍

텃밭을 하거나 원예를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는 호박 키우기가 나에겐 어렵만 했다. 분양받은 텃밭엔 덩굴 자라는 채소는 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결국 키울 수 있는 곳은 집 베란다 화분뿐이었다. 어쨌든 호박잎을 얻기 위해 호박을 심었지만 해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밭 할머니 집엔 여름이 시작되면 호박이 지붕을 타고 올라갔다. 봄이면 우영 팟에 잘 말려둔 호박 씨앗을 꾹꾹 찔러놓고 배추랑 상추를 먹다 보면 호박 덩굴손이 이리저리 올라갈 곳을 찾았다. 할머니가 빨랫줄 한쪽을 내어주면 호박은 신나게 잡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느 날 머니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술빵을 찌나 했는데 냄새를 맡니 호박죽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호박잎 사이로 나온 덩굴손

찜기에 차곡차곡 포개진 건 박잎이었다. 할머니는 식힌 호박잎 반으로 잘라 내 손에 올려주셨다. 잎을 손바닥에 올려 보리밥을 넣고 살짝 된장을 발라 고기쌈을 먹듯 한입에 넣었다. 호박잎이 부드럽게 감기는 맛은 더위에 짜증 나던 마음도 보드랍게 감싸주었다. 그렇게 서너 번 잎을 싸 먹으면 밥은 금방 라졌다.

호박잎은 날마다 새로 나고 며칠 만에 또 호박잎을 땄다. 할머니가 호박잎 뜯는 걸 구경만 하다 잎을 하나 따려고 잡았는데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엄청 뾰족한 가시가 손을 찔렀다. 다시 보니 호박잎 뒷면과 줄기는 모두 흰 가시로 둘러싸여 있었다. 만지는 순간 그대로 가시가 손가락에 박혀버렸다. 할머니가 손을 대지 말라고 한건 그 때문인데 몰랐던 것이다. 할머니는 다시는 만지지 말라고 일러주시며 가시를 빼주셨다. 가시를 다 빼고 손가락을 꾸욱 눌러 피를 짜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아픈 척 안 하시고, 맨손으로 톡톡 잘만 따셨다. 호박잎을 따고 나면 손질을 해야 하는데 줄기가 빨대처럼 비어있었다. 잘린 줄기의 테두리를 조금 잘라 가시가 붙은 쪽을 살살 당기면 얇게 벗겨지며 연한 속살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할머니가 못하게 하셨다. 슥슥 소리 내며 벗겨지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데 말이다. 손질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니 호박잎이 왜 그리 보드라운지 느낄 수 있었다.

별을 담은 호박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호박잎을 마지막이라며 잔뜩 따셨다. 잎도 새지고 호박을 여물게 해야 하니 이젠 못 먹는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잎은 구멍도 나고 반점도 생겨 점점 쭈글쭈글한 할머니 얼굴처럼 색도 누렇게 변해갔다.

그날 생애 처음 호박잎 국을 먹었다. 메밀로 만든 빙떡 냄새가 나는 듯한 국이었다. 할머니가 메밀가루를 넣으셨다고 몸에 좋은 거라며 어서 먹으라고 하셨다.

여름 한가운데가 되자 호박 덩굴에서 기다리던 노란 꽃이 피었다. 별처럼 노란 호박꽃은 가을날 호박이 되어 할머니 얼굴을 환하게 웃게 했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호박 덩굴 2020.07

여름이면 호박잎국이 항상 그리웠다. 몸을 감싸는 여름의 열기가 막 찜통에서 나온 호박잎을 한 김 식히고 손바닥에 올려 먹던 따뜻한 온도를 떠올리게 했다.

작년엔 베란다 화분에 씨앗을 심고 호박잎 열 장 수확했다. 그런데 벌레가 나보다 더 많이 먹었다. 물을 주고 살피며 초록잎을 내내 기다렸는데 실내에서 호박잎 농사를 짓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할머니 손 대신 나는 가위로 잎을 잘랐다. 그리고 비싼 송이버섯처럼 애지중지 다듬고 국을 끓였다.

아쉬운 내 손맛이지만 호박잎과 메밀은 멸치 육수와 잘 어우러졌다. 막상 먹으려고 보니 오랜만에 뭉클해졌다.


호박잎을 올해 수확하지 못했으니 마트를 다녀와야겠다. 아픈 무릎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셨지만 어린 나는 그걸 몰랐고 호박잎은 내내 할머니를 기억하게 한다.

박 덩굴은 나를 감싸주던 머니와 추억 떠올리게 했다. 할머니가 키우던 호박씨를 물려받은 듯 봄이면 빈 화분에 추억을 담았다. 매년 성공과 실패를 가지만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난 호박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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