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배추가 자라던 텃밭상자가 허전하다.구청에서 분양하는텃밭에 당첨되기만 기다리며, 빈 상자에 아무것도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파 몇 개와 부추 몇 가닥, 지난겨울부터 자라는 적상추 하나와 당근 싹이 남았다. 뽑기도 그렇고비워두기도 미안해서 눈요기도 할 겸 그냥 두고있었다. 새 모종을 심든 씨앗을 파종하든 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갈팡질팡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나를 보는 것처럼 텃밭 상자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기대했던 텃밭은 당첨되지 않았고, 예비 후보자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흙냄새 풍기는 텃밭을 오가며 싱그러운 채소 키우는 봄을 기대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한번 해봤으면 됐지, 또 욕심을 냈나 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허전하고, 당첨된 분들이 너무도 부러울 뿐이다.
베란다 텃밭상자는 아직 그대로다. 텃밭상자도 나도 당장은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빈틈이 빼곡하게 채우는 일이 너무 좋아서 공백을 두지 않았다. 꼬박꼬박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있는 상황을 오랫동안 즐겼다.뭐든 서둘러 해치우기 좋아하는 내 성미 탓이기도 하지만, 일에 집중하다 보면 우울한 감정이나 쓸데없는 걱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늘 변화무쌍한 초록 식물들을 가까이하는 것도 내겐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의기소침해진 나를 위로하는 건 또 초록 식물이었다. 경칩이 될 무렵 갑자기 적상추가 키가 커졌다. 잎을 뜯어먹을 만큼 상추가 자라지 않아서, 꽃은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보란 듯이 꽃대를 만들었다. 줄기 끝에 꽃봉오리가 잔뜩 붙어 나서 꽃다발처럼 필 줄 알았다. 그런데 상추 꽃은 매일 한 두 송이씩만 피고 반나절이면 돌돌 말려서 시들었다. 나팔꽃처럼 상추 꽃도 매일 새로 피었다.
적상추 꽃(2022.03)
상추 잎은 못 먹었지만, 날마다 나는 새로 피는 꽃을 실컷 보고 있다. 상추 꽃이 매일 새로 피니, 꽃을 보는 나도 뭔가 해보고 싶어졌다. 어느덧 시든 꽃은 통통하게 씨앗주머니가 되고 있었다. 제대로 키우지 못한 상추였는데 꽃이 지고 나면 씨앗이 생긴다는 걸 잊고 있었다. 상추 잎을 수확하지 못했으니 농사는 실패한 듯했지만 사실은 성공한 상추였다.
텃밭에 핀 상추 꽃이라면 상추 수확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데, 지금 텃밭 상자에 핀 상추 꽃은 다음을 기약하는 듯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라며 부추기는 듯 말이다.
버려야 할 것은 헛된 기대였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 시작하면 된다는 믿음이었다. 텃밭은 갖지 못했지만, 아직 시작하지 않은 빈 텃밭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게을러지기 전에 내 작은 정원에 초록 식물들이 잘 맞는 자리를 만들어줘야겠다. 매일 들여다보는 화초들에게도 봄이 왔다고 말을 걸어야겠다. 상추 꽃 덕분에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잘 보낸 듯싶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도전할 때가 된듯하다. 텃밭에 막 심은 첫 모종처럼 아직은 키가 작고 조그마한 글로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