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기만을 기다린 수확이었다. 그 주인공은 작년 가을 텃밭 상자에 심은 얼갈이배추였다.
늦여름까지 방울토마토를 키웠던 텃밭상자가 비어서 배추 씨앗을 심었다. 계절은 겨울을 향하고 있었지만, 배추는 싹이 금방 올라오더니 초록 내음을 풍기며 천천히 자랐다. 작은 배추밭은상자 속에서 새봄이 될 때까지 탈없이 지냈다.한껏 따뜻해진 봄 햇볕에배춧잎은 힘을 얻은 듯풍선처럼 부풀더니 텃밭상자를 꽉 채워 버렸다. 빽빽한 잎 사이로 벌레들이 생기기 전에 수확을 해야 했다.
배추를 뽑으려고 했지만 쉽게 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밑부분을 단단히 잡고 흙을 살살 걷어내며 위로 당겼다. 곧게 뻗은 매끈한 뿌리는 잔뿌리까지 가지런하고 단정했다. 좁은 흙 속에서도 왜그렇게건강하게 자랐는지 알 것 같았다.
손으로 문지르면 초록색 물이 묻어날 듯 잎은 싱싱했다. 얼갈이배추 특유의 시큼한 듯 달큼한 향내가 까슬거린 잎 사이로 맡아졌다. 시장에 파는 얼갈이배추보다는 길이가 짧은 듯했지만, 촘촘하고 겹겹이 자란 배춧잎들은 서로 부딪칠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얼갈이 배추 수확 (2022.03.11)
흙 만지는 일이 얼마만인지 흐뭇하고 설레었다.
무슨 일을 해도 나만 안 되는 듯 풀이 죽어 있었는데, 배추는 푸짐한 초록 손을 내밀며 내 빈손을 잡아주었다. 매번 내가 좋아할 만한 보상을 주는 흙은 오늘도 내 손을 들어주었다.
뿌리에 뭍은 흙을 털어내니 흙냄새가 우울했던 뇌세포까지 흥분시켰다. 온몸에 흙의 기운이 감싸고돌며 진정한 새 봄을 느껴지게 했다. 배추밭은 빈 흙만 남았지만, 봄의 에너지가 여전히 느껴졌다.내 수고를 알아주듯 보상받는 수확의 기쁨도 좋지만, 빈 흙에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기분을 더 좋아한다.
시골이 태생이라 그런가? 왠지 모르게 흙은내게 편안함을 준다. 어쩌면 흙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흙으로 덮어두듯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관심 두는 것은 일단 모아두었다. 감정이나 속마음도 잘 숨겨두었다. 흙에 심는다고 모든 씨앗이 크는 데 성공하지는 않지만, 일단 흙속에 넣어두고 다른 일에 집중했다. 언젠가 쓰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가 생겼다. 하고 싶은 꿈들을 숨겨두었지만, 결국은 하나씩 이룰 수 있었다. 적당한 때를 찾을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흙이 갖고 있는 끈기 있는 넉넉함과 변화무쌍한 태도를 나도 닮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흙에 구멍을 파고 씨앗을 넣어 흙을 덮는 일은 섬세한 작업은 아니지만, 정성이 필요하다. 무뚝뚝하고 복잡한 걸 싫어하는 내 성미에 딱 맞는 일이기도 했다. 싹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싹이 올라와 커가는 식물을 보는 즐거움은 기다린 보람을 충분히 주었다. 배추 수확을 한 탓인지 하루 종일 붕 뜬 기분이 들었다.
배추가 다 크면 감자탕을 해 먹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풀린 날씨 탓인지 영 당기지 않았다. 대신에 뭘 만들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시원한 배추 된장국을 해먹을지, 나물로 고소하게 비벼 먹을지, 매콤하게 겉절이로 무쳐낼지 말이다. 잘 자란 배추를 보니 기분이 좋았는데, 바로 식탁 위에 올릴 음식으로 만들어 버리긴 미안했다.
잠시 배추를 보며 지난겨울을 기억해보려고 했다. 봄이 오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는데, 새봄이 와도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래도 얼갈이배추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니 더없이 좋은 내편이었다.
다시 소박한 계획을 세웠다. 얼갈이배추가 있던 자리엔 또 다른 희망을 심었다. 이제 빈자리를 토마토 씨앗이 넘겨받았으니, 내 삶은 새로운 기대를 품은 채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