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한창이던 날 동네 골목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동안 안보이던 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채송화였다. '구멍에서 땅꽃이 피었네!'라고 하시던 할머니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 할머니 집 마당에서도 본 것 같았다.
귤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어린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귤밭으로 가셨다. 나는 할머니 마당에서 보내는 일이 하루 일과였다. 할머니 집 마당엔 채소를 키우는 우영팟(텃밭)이 있었고, 내 놀이터는 돌멩이가 깔린 빈 마당이었다. 놀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바닥돌 사이로 뾰족하게 생긴 초록색 풀들을 밟지 말라고 하셨다. 점심 먹고 나오니 초록 풀에 알록달록 빨강, 분홍, 주황, 노란색 꽃송이가 피어 있었다.
"할머니! 꽃 났어요."
할머니는 별말이 없으셨다.
"할머니 이거 무신 꽃?
"땅꽃"
그렇게 대답하시고는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귀찮으신가 생각했다. 꽃 이름을 물었는데 땅꽃이라고만 하시니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마당에 피었던 땅꽃은 저녁이 되자 꽃잎이 시들해졌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일과를 마친 가족들이 둘러앉으니 할머니는 그릇에 가득 콩조림을 담아오셨다. 할머니 여름 밥상에는 수박과 된장, 마농지(마늘 장아찌), 얼갈이배추김치가 늘 있었다. 상이 작아서 나와 엄마는 따로 쟁반에 올려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날은 색다른 간장 냄새가 나는 콩조림을 먹었다.
숟가락으로 콩 몇 알을 입에 넣으니, 짭조름하기도 한데 고소하고 폭신 거리며 말캉말캉 콩이 씹혔다. 콩을 씹다 보니 콩나물 맛이 나기도 했다. 조림에 넣은 간장은 엄마가 쓰는 거랑 다른지 달콤한 맛이 더 났다. 콩을 밥에 넣어 비벼 먹으니 밥은 금세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부모님을 종일 기다리며 궁금한 것들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아빠에게 할머니 마당에 핀 꽃 이름을 물었더니 '채송화'라고 알려주셨다. 할머니는 땅꽃이라고 했다고 하니, 땅꽃이 채송화라고 하셨다. 제주에서는 채송화를 땅꽃이라고 부르는 걸, 할머니도 몰라 땅에 피어있어 땅꽃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다음날 할머니 마당에는 더 많은 채송화가 피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얇고 투명한 빛이 나며, 꽃잎은 반짝반짝거렸다. 등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꽃구경을 하다,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부엌으로 갔다. 어제저녁에 먹었던 반찬 냄새가 났다. 할머니와 단둘이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입안에서 돌 같은 게 느껴졌다. 할머니 모르게 뒤로 돌아 손에 뱉어냈다. 가만히 보니 하얀색 동그란 돌이었다. 웬 돌인가 싶어 할머니 눈치를 보며 밥상에 내려놓으니, '우럭 눈깔'이라고 하셨다.
우럭 눈알이라고 하니 밥이 더 먹기 싫어졌다. 뭐지? 밥상 위를 둘러봤지만, 반찬 중에 생선은 없었다. 그만 먹겠다고 하면 할머니에게 혼이 날까 봐, 남은 밥을 콩조림 국물에 비벼 먹었다. 우럭 눈알의 정체는 영영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밭일이 많아서 한동안 나는 할머니 집에서 지내야 했다. 할머니는 아침 식사를 하고 어디론가 나가시면, 마당에는 나와 채송화만이 남아 점심때 들어오실 할머니를 기다렸다.
새 봄이 오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 집에 들어서자 보말(바닷 고둥) 삶는 냄새가 났다. 밤새 배낚시를 갔던 아빠가 돌아오셨나 보다. 집 마당엔 낚시에 쓰인 옷가지와 도구에서 짭조름한 바다향이 진동했다. 보말이 삶아지자 이쑤시개를 손에 쥐고 보말을 빼먹기 시작했다. 보말을 먹고 반쯤 배가 부르니 구쟁기(뿔소라)가 삶아졌다. 부엌에선 고소한 간장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남은 보말은 엄마가 모두 까서 자작하게 간장을 넣고, 약간의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반찬으로 만드셨다.
저녁상엔 보말 반찬과 삶은 구쟁기와 생선조림이 올라왔다. 처음 보는 생선조림인데 붉은색 생선 위에 콩이 가득 올려져서 있었다. 냄새가 익숙해서 엄마한테 물었더니, 시집와서 할머니에게 배웠다며 아빠가 좋아하는 우럭 콩조림이라고 하셨다. 벌써, 아빠는 숟가락으로 콩과 마농지를 한입에 넣고 연신 맛있다고 하셨다.
나도 젓가락으로 콩을 집어 먹어 보았다. 내 시선은 냄비 안 우럭 눈알에 가있었다. 어떤 호기심이었을까? 젓가락으로 눈알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 입안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그제야 할머니 집에서 먹었던 콩조림 맛이 기억났다. 내가 할머니 집에서 먹었던 반찬은 우럭으로 만든 생선 콩조림이었던 것이다.
제주에 토속음식인 우럭 콩조림은 보통 어른들은 생선을 먹고, 아이들은 콩을 먹었다. 사실, 우럭은 머리 크기가 몸통과 비슷하고, 가시도 많아 살도 별로 없는 작은 생선이다. 아이들에게 콩만 먹이는 것이 안전하고 건강에도 좋았을 것이다. 입덧이 심했던 나는 우럭 콩조림이 먹고 싶어, 엄마가 만들어 보내주신 적도 있었다. 자주 먹을 순 없지만, 싱싱한 붉은 우럭이 제주 동문시장에 나오면 엄마는 보내주시곤 했다.
택배로 온 냉동된 우럭이지만, 엄마의 비법대로 엄마표 집간장에 통생강을 넣으면 비린내가 덜 났다. 할머니 스타일대로 우럭보다 흰콩을 더 넣는다. 마지막으로 아빠가 좋아하시던 마농지를 꼭 넣어야 제맛이 난다. 고춧가루는 솔솔 뿌리는 정도만 넣고 자작하게 조려낸다. 나는 여전히 생선살보다는 콩을 먼저 먹는다. 우럭 콩조림을 씹으면 고향 바다에 가고 싶고, 할머니도 아빠도 그리워진다. 엄마는 이제 할머니가 되셨다.
나는 이제 귤밭 농사짓는 부모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할머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던 손녀는 제주도를 떠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한때는 가까이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분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묻고 싶어 진다.
고향에서 자라며 먹던 음식은 어린 시절 나를 충분히 보호해줬고 용기도 심어주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나를 위로해 주었고, 먹을 때마다 내 마음을 다 안다며 언제나 내 편이 되는 바닷가 가까운 고향 음식이다.
함덕 서우봉 해변(함덕 해수욕장)
* 마농지(마늘 장아찌) - 봄이면 제주에서는 마농지라고 어린 마늘대로 장아찌를 담근다. 입맛 없는 여름에 마농지 몇 개만 있으면 밥을 다 먹을 정도다. 마농지는 마늘대를 잘라서 만드는데, 가운데 마늘쫑이 들어 있다. 그리고 겹겹이 양파처럼 분리가 되는데, 한 겹 벗겨 먹으면 명이나물 절임처럼 느껴진다. 내 입에는 명이나물 절임 맛이랑 비슷하지만, 마농지가 훨씬 풍미가 더 향긋하면서 깊다. 엄마는 마농지를 먹을 때면 진한 마늘냄새 때문에 먹고 나면 꼭 양치를 하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