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독자인 글을 쓴다

내가 읽고 싶은 글

by 무쌍

가장 먼저 가을을 찾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모두가 시간에 맞춰 일사불란한데 나만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멍해 있었다. 곱게 물든 가을 잎이라도 찾으면 뒤쳐진 듯 한 기분을 만회라도 할 듯싶었다. 빨리 물든 단풍잎을 보고 싶어 청단풍나무 숲으로 향했다. 줄 선 단풍나무는 여전히 여름색을 하고 있지만, 바닥엔 물든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낙엽은 서툰 솜씨로 모양을 만들고 색은 대충 칠한 듯 투박해 보였는데, 곰곰이 보니 성격 급한 아이처럼 나무도 가을을 시도하는 듯 보였다.


초록, 노랑, 주홍. 분홍. 빨강, 회색, 갈색... 청 단풍잎은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다. 청단풍나무 숲 아직도 초록빛이 그대로여서 알록달록한 물든 낙엽은 금방 눈에 띄었다. 단풍잎은 튤립 꽃처럼 왕관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내가 찾은 첫 단풍잎은 너무 서둘렀는지 갈라짐이 없는 잎이었다.

이른 단풍잎 인증 사진을 찍고 나니 뭔가 여유가 생긴 걸까? 나만 왜 어려운 건지, 나만 빼고 모두 잘 지내는 듯 답답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낙엽 한 장이 채워주었다.


사회생활에서 이미 멀어진 엄마라는 역할은 잘 지내다가도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아이들과 북적이는 일도 경력이 되는 곳이 있을지 구직사이트를 두리번거렸지만 곧 창을 닫아버렸다. 글을 쓰려고 다짐했을 때 이력서를 쓸 일은 없을 거라 다짐했지만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나 보다. 포기하는 일이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것만큼 간절했는데도 그랬다.

내 글의 첫번째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는 뭔가를 마음먹으면 좀처럼 다른 사람의 충고를 은근히 듣지 않는 편이다. 려서부터 혼자 결정하는 것이 익숙해서 인지, 충고를 듣는 동안 마음속엔 의지가 더 단단해지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결혼은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혼자가 아닌 가족, 아이들에 대한 것들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육아에 대한 무용담은 다이내믹하지만 나는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나를 위로하는 글이 필요했다. 조용히 투정을 부리는 나 자신에게 계속 참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서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엄마가 아닌 나만의 일과가 필요했다.

둘째를 낳고 삼 년 가까이 아이를 끼고 도서관을 수도 없이 오갔다. 그런데 모델링 때문에 도서관이 문을 닫으니, 습관처럼 가던 도서관을 강제로 발을 끊게 되었다. 일상이 모두 틀어졌다. 자유를 맛보기 위한 여행 에세이, 오래전 기억 속의 고전문학, 따끈한 신간도서, 팬심으로 한 작가의 작품을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달아 보는 일도 못했다.


신 일기를 쓰듯 노트를 채워갔다. 불편한 마음을 쓰기 시작하니, 책을 읽으며 다독이던 시간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살갗이 닿는 듯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어느 부위에 상처가 난 건지 알게 되었다.

일기검사를 받던 때가 떠올랐다. 선생님이 빨간색으로 틀린 글자를 고치고, 한마디를 써주던 기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확인' 도장만 찍힌 것 아니라 일기를 읽고 답장을 써주시듯 다정한 한마디 말이 쓰여있을 때는 참 날아갈 듯했다. 요즘 그 한마디 가 그립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글을 막 배우던 때로 돌아갔다. 나는 검사받지 않아도 되는 일기를 다. 특히 하루 종일 책상에 앉을 틈이 없던 날일 수록 더 그랬다. 내 글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위로받기도 했다. 나만 아는 괴로움에 맞는 처방을 스스로 찾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좋아하는 나지만, 내가 쓴 글을 더 많이 읽기 시작했다. 나만의 글쓰기는 매력적이지만 여전히 어렵다. 언젠가 글쓰기 작법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읽고 싶은 글을 찾지 못했다면, 그 글은 내가 써야 한다"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쓰는 건 첫 독자인 나를 위해서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