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에 냉장 보관되었던 글쓰기

다시 시작하다

by 무쌍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했지만
엄마는 될 수 있었다.


약을 먹고 나서 4년 정도 되었을 때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일은 사라졌다. 우울함과 불면증도 차츰 좋아졌다.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고, 하고 싶던 일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의사는 문제없다며 내게 용기를 주었다. 임신기간 동안 매달 호르몬 검사를 해야 했지만 아이는 잘 버텨주었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했지만 엄마는 될 수 있었다.


어디서든 작은 희망을 찾아야 했다.
집에만 머물다 보니 밖으로 나서는 일이 겁났다. 갑상선 때문에 직장을 관두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예전처럼 직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 이력서는 매력이 없어졌다. 출근은 못하지만 일은 하고 싶었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도 떨어진 이유가 있을 듯한데, 내겐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엄마 노릇을 겨우 하고 있지만 무기력했다. 나를 둘러싼 공간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가까운 곳에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법을 궁리했다. 그것이 작고 흔한 것이라고 해도 내게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은밀한 곳에 숨겨둔 비밀상자 속, 한 번도 표현해 본 적 없는 언어들을 꺼내보고 싶었다.


몸에 기운이 없을 때면 병원에서 처음 진단받던 날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른다.


의사의 첫마디는 "많이 피곤하시죠?"였다.
낯선 타국에서 모국어를 쓰는 동포를 만난 듯 속 시원하게 말이 통하는 귀인을 얻은 기분이었다.
"네 맞아요. 너무 피곤하고 잠을 자도 계속 졸리네요."
"우선 일주일 치 약을 처방해 들릴 테니 바로 드세요. 일주일 정도 드시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좀 다르다고 느낄 겁니다. 대신에 무조건 쉬셔야 합니다."
"저 직장은..."
"일은 지금 당장 멈추세요. 휴직을 길게 하셔야 할 겁니다. 6개월 정도 지켜볼게요. 목이 이미 많이 부어있네요. 초음파 검사도 해야 합니다. 약을 드시면 확실히 나아지실 거예요. 이대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요."


의사 말대로 약을 먹고 일주일 만에 아침에 일어날 때가 되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몸에서 부기가 빠졌다. 한동안 기력이 없는데도 잠도 오지 않는 밤이 무서웠다. 불면증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우울증이 삶의 의욕을 떨어뜨렸다. 무기력함이 불러온 느림은 갑상선 호르몬제로만 좋아지지 않았다.
뭔가 하려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게 했다. 새로운 시도는 물론 일상의 활력도 사라지기만 했다.

의사가 좋아질 거라며 약속한 1년 동안 나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내가 호르몬 약을 끊지 못하는 확률 20% 안에 포함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직장으로 돌아갈 희망은 사라졌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거란 두려움만 커져갔다.




"좀 서늘하고 좀 나른하고 기력이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는 7년간 외출한 상태로 가족들은 그를 차갑게 방치함으로써 생명을 살렸고, 우리는 그에게 온기를 불어넣으면서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갔다. 급성 암도 무려 7년간 냉장 보관된 것이다.

의사며 작가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의 책 <모든 것이 그 자리에>에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 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의 목소리로 환자 이야기를 쓰지만 그의 글은 환자가 쓴 듯 감성이 들어있다. 7년 동안 병명도 모른 채 무기력했던 환자를 우연히 만났고, 그를 검사했더니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었다. 치료를 받기 시작하니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얼마 뒤 급성 암으로 죽게 된다. 너무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같은 병을 갖고 있는 그가 왜 죽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의사인 그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갑상선이 재 기능을 하자 몸에 숨겨져 있던 암세포도 되살아났고, 급성 암은 빠르게 몸을 파괴해 버렸다. 갑상선이 암까지 꼼짝 못 하게 묶어 둘 수 있는 괴력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이었다. 의사도 환자도 갑상선이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논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암세포도 힘을 못쓴다니 나의 무기력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최고 용량으로 먹고 있으면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했으니 말이다.

그는 책 속에서 갑상선 기능 저하증(Hypothyroid)의 증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갑상샘은 우리 몸을 덥히는 난로 같은데, 난로가 고장 나 살아있지 않은 냉장보관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의 설명대로 라면, 내 갑상선이 망가지면서 무엇이 함께 냉장 보관되어 버린 것일까?
그건 내 삶의 열정들이었던 것 같다. 뭔가 하려는 시도들을 차갑게 냉장 보관해 버린 것이다. 일을 하면 분명 더 병이 악화될 것이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란 진단을 받고 나선 하고 싶은 일들도 냉장 보관해 버리고 꺼내 보지도 않았다.




매일 새롭게 피는 나팔꽃처럼 아이가 날마다 웃게 해 주었다. 나도 꽃피울 것이 있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시작하려고 했지만 또 다른 벽이 날 기다렸다.

두려워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면 어쩌지?
지금 안 하면 다음에 기회가 없을지 몰라?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독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내 글이 놀림감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야 했다. 내 존재를 확인할 길은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정 분량의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했다. 오래 앉아 있으면 금방 잠이 쏟아졌다. 신호가 올 때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썼다. 쓰다가 자고,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다 보니 엉덩이도 익숙해져 갔다.

갑상선이 망가지면서 냉장 보관되었던 나의 열정을 하나씩 꺼내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을 흠모했던 나, 그리고 글을 쓰고 싶던 나를 만났다. 내 이야기는 이제 차갑게 침묵하지 않고 날마다 노트에 옮겨진다.
온기를 찾은 <갑상선에 냉장 보관된 글쓰기>는 작은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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