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섰다. 한가로운 산책은 아니었지만 빌릴 책이 있으니 발걸음은 경쾌했다. 찬바람이 사람들을 모두 데려갔는지 주말인데도 길가는 휑했다.
자주 가지 않는 길 모퉁이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무실이 보였다. 정수기 옆에 믹스커피 박스가 올려져 있고 휴지통에 꽃꽂이를 해 놓은 듯 빈 봉투가 수북했다. 시간을 금쪽같이 써야 하는 일터엔 커피 빈 봉투도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업화를 신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종이컵 두 줄과 믹스커피 박스를 들고 지나갔다. 일터로 가는 빈 종이컵을 보니, 종이컵에 커피를 녹이며 긴장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일터에선 시간이 없다. 뒤를 돌아볼 시간, 내 뒤를 살펴볼 시간. 기운을 끌어모아 일을 마치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종이컵을 들고 다니는 시간은 그랬다. 한번 마시고 버려지는 종이컵 용도는 회의실 위에 올려진 대단한 일정과 숫자들이 인쇄된 A4 종이들과 비슷했다
휴직을 하라고 권하는 의사에게 커피는 마셔도 되는지 물었다. 믹스커피만 피하라고 하는 말에 그래도 안심했다. 커피는 끊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야근을 해도 끝나지 않는 일처럼 믹스커피와 종이컵은 늘 탕비실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믹스커피와 나의 인연은 월급봉투를 포기하면서 쉽게 정리되었다.
식사시간만 빼고는 혼자 식탁을 차지한다. 식탁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채 뭔가를 한다. 읽고 쓰고 또 읽고 그냥 쓴다. 글을 쓰는 시간은 언제나 혼자다. 아이들은 이따금씩 엄마를 부르지만,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속이 다 비치는 작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을까? 뻐근하게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자 퇴근시간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혼자 하는 작업엔 근무일지가 없다. 동료도 없고, 보고 해야 할 상사도 없다. 그렇지만 매일 자기 전까지 마감시간이 정해져 있다. 끝내고 싶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마음을 달래줄 뭔가가 필요했다. 갑자기 종이컵 커피 시간이 그리워졌다.
이상하게도 믹스커피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고 해내야 할 때였다. 자신을 믿고 견뎌 내야 할 때였다. 식탁을 지키는 엄마가 되어도 견딜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믹스 커피 대신 커피에 우유를 가득 넣어 마셨다. 설탕을 넣지 않았지만 믹스커피와 비슷한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끝도 안 보이는 막막함을 버리기엔 책읽기가 가장 적합했다. 그리고 막다른 길을 빠져나와 후미진 골목을 돌아, 작은 오솔길을 걷 듯 다른 작가의 글에서 산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