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장미꽃이 있나 싶었지만, 화단은 모두 겨울 뒤로 숨어버렸다. 정원엔 방한을 위한 보호대가 세워졌고, 장미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가지치기되었다.
꽃들은 이미 떠났고, 바짝 마른 가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정도로 생기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붉은 장미가 달린 가지가 있었는데, 갈색으로 변한 잎 몇 장만 남아 곧 떨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꼬박꼬박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장밋빛으로 물든 인생을 찾고 있었다. 장미꽃을 보며 내 삶도 반짝반짝거리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이 시간, 존재하지 않는 붉은 장미꽃을 만날 길은 없었다.
혹시 향기로운 장미꽃을 방안 가득 꽂아두면 그런 기분이 들려나? 더 쉬운 방법은 장미가 가득 핀 정원에 앉아 실컷 장미를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계절의 순리대로 눈앞에 겨울이 와버렸지만, 머릿속은 장미꽃이 만발한 풍경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상상 속 장밋빛을 불러와도 상쾌한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상상 속 걱정은 파도처럼 불안을 데려오지만, 무작정 낙관하려는 마음도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기대하면 꼭 거절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꽃이 만발한 장미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었다.
장미나무 가시보다 더 날카로워진 작은 가지들 사이로 나팔꽃 덩굴이 남긴 꼬투리가 보였다. 가느다란 갈색 줄기는 볏짚 단에서 나온 실오라기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열매를 단 나팔꽃 덩굴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안경을 쓴 듯 세상이 환해졌다. 가지치기된 장미와는 다르게 나팔꽃 줄기는 아무렇지 않게 남아 있었다. 장미가 둘렀던 나팔꽃 덩굴엔 동그란 꼬투리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분들 중엔 이런 탐스러운 꼬투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야생화만 찍는 사진작가는 가을 들판에서 토실하게 여문 꼬투리를 종일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는 꼬투리를 보고도 그냥 참고 돌아 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그런 꼬투리가 있었다.
미루던 일을 해야 할 듯했다. 가을 내내 베란다에서 피었던 나팔꽃 덩굴을 정리했다. 줄기마다 달린 꼬투리를 가위로 하나씩 잘라냈다.
나팔꽃이 남겨준 씨앗은 과분할 정도로 많았다. 꽃 한 송이가 남긴 꼬투리엔 6개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검은 씨앗이 또로록 떨어졌다. 천 원짜리 씨앗봉투에 있던 몇 알의 씨앗은 열 배는 더 많아졌다.
내게도 씨앗이 있었으면 좋겠다. 심어 두었더니 꽃이 피고 씨앗으로 남는 그런 마법 같은 일 말이다. 어쩌면 내게도 씨앗 상태로 있는 DNA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씨앗 안에 숨겨져 있더라고 뭐든 찾고 싶었다. 하지만 씨앗으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워야 하는 도전이 필요했다. 싹이 트고 꽃이 피어야 어떤 재능인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나팔꽃이 알려준 건 바로 '용기'였다. 다음 계절을 기약하며 또다시 도전해보겠다는 용기를 말이다. 민들레 갓털처럼 여행을 떠나는 씨앗도 있지만, 태어난 자리를 지키는 씨앗도 있다. 나팔꽃은 내게 지금 역할과 자리를 지키면서, 다시 해보라고 용기를 남겨 주었다. 용기의 씨앗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봉투를 더 단단히 묶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내 씨앗도 나팔꽃처럼 줄기가 뻗어 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다른 씨앗들도 차근차근 키워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