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아래 뿌리는 불빛 사이로 함박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비는 찾아올 때마다 자기를 봐달라고 툭 툭 툭 요란했지만, 눈은 속을 알 수 없는 짝사랑처럼 조용히 입을 다문채 할 일을 하는 모습이 자꾸 신경 쓰였다. 새하얗게 덮은 바깥은 가로등 불빛보다 더 환하게 밤을 밝혔다. 눈 구경이 하고 싶은 건지, 창밖이 너무 밝아서 인지, 그리움 때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블랙커피에 설탕 한 스푼을 넣으면 부드럽고 달콤해지듯, 내게도 변화를 위한 자신감 한 스푼이 필요했다. 갖은것을 다 뺏겨도 털고 일어서려 했다. 애당초 우린 빈 몸으로 세상에 나왔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며 애써봤다. 오늘 하루는 차갑지만 십 년쯤 뒤엔 기억도 안 날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대신 등잔 밑에 있어 보지 못했던 낯선 내면을 알게 되었다.
가슴에 들어차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 작업에 푹 빠져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면은 다짜고짜 얼굴을 내밀어도, 졸졸 쫓아다녀도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내면은 그림자처럼 내게 붙어 있긴 했지만, 행복이나 사랑처럼 밝은 지역에선 생각나지 않았다. 어둠이 깔리고 빛을 잃어가는 상황이 되서야 생각났다.
내가 아닌 바깥세상은 멀쩡해 보여도 비열했다.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 싶었을 때 내면은 작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깐깐하고 냉정한 줄 알았지만 나를 감싸고돌았다.
"지금 당신은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거예요. 당신에게 있어 가장 좋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누구도 당신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타인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운 내면은 타인의 동의도 확고한 자기 확신도 필요 없었다. 동전 앞뒤처럼 분명한 무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은 모든 걸 하얗게 덮어 눈속임으로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게 했다. 완전히 얼지 않은 호수에 덮인 눈처럼 함정이 되거나, 쓰레기 더미를 소복하게 덮어 눈더미처럼 보이게도 했다. 화단인 줄 모르고 키 작은 화초를 밟아 꺾어 버리는 실수도 하게 했다. 무지했던 내 눈은 쌓인 눈처럼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작은 눈송이가 쌓인 눈덩이가 될 때까지 나만의 대화는 금방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가로등 아래 불빛은 쌓인 눈과 섞여 버렸다. 밝은 곳은 저 밖이지만, 내가 있는 곳은 어두워도 더 잘 보였다. 한 스푼씩 모아진 자신감은 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눈이 쌓이듯 내게도 조금씩 자신감이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