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을 벗어야 만들어진다

홀로 서는 책임

by 무쌍

뱃속에 아이를 키워본 경험은 내게 생명 탄생이 깊고 광활한 침묵이 필요하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큰 바닷속에 빠진 듯 몸이 흘러가는 데로 맡겨야 했다. 바닷속 감옥을 빠져나오니 한 번도 본 적 없 보석이 품에 있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 생소했지만, 충만해진 감정이 눈물로 흘러내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희의 감정을 한 번도 솔직하게 표현한 적 없는 것처럼 그 경험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삶을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치 나는 재탄생을 기다린 듯 '마흔'이란 나이를 기다렸다. 막상 마흔 살이 되었지만, 융이 말한 내면의 지진은 커녕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섭섭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있는 '마흔'이란 제목이 들어간 책을 모조리 읽었다. 그중에 한 권이 제임스 홀리스의 책이었다.

그가 쓴 <The middle passage 인생의 중간 항로에서 만나는 융 심리학>이 우리말 번역 제목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였다. 그리고 그냥 읽었다. 마흔은 되었지만, 나는 누군지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 그 책은 의미 없이 지나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같았다.


시간이 좀 흘렀고, 다시 읽었을 땐 그 책 호러영화처럼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떨치지 못하는 우울, 불안, 분노, 뭔가 이상한 가족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지만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말문이 막혔다.


어느 한순간이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내 최초의 탄생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탄생 그 자체가 숭고하고, 삶의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나는 갖지 못한 듯했다. 고통스러웠다. 대신 나를 '깨고 나오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글을 쓰는 건 '재 탄생' 같은 것이었다. 달걀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병아리가 된다는 말보다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온다는 말이 더 와닿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재생의 의미가 있어서 그렇다. 죽은 듯 멈춰진 번데기에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나비는 알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며 배를 채우던 시절이 있어야 한다. 야금야금 먹고 꼼지락꼼지락 기어 다니며 몸을 키우는 성장기다. 먹고 소화시키며 몸이 부풀고, 계속 성장만 한다. 그러다 배가 터질 듯 한 몸에서 점액질 같은 실을 뽑아낸다. 먹은 것을 다시 토해내듯 실로 자신의 몸에 보호막을 두른다. 성된 번데기로 무장한 채 세상과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고독의 시간으로 빠져든다.


그 자연의 섭리에 나를 맞춰보게 했다. 내가 마침내 나비가 된다면,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 걸까? 알에서 깨어난 것이 다라고 믿는 애벌레가 아닐까? 모르는 것이 많고, 알아야 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시간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좀 똑똑해진 듯 하지만, 하루가 지나면 잊어버렸다. 작가가 말한 대로 따라 하고 싶지만 금방 게을러졌다. 언제까지 배우는 일만 열중할 수 없었다. 스스로 번데기를 만들어야 했다. 꾸역꾸역 허기짐을 해결하려고 먹기만 하다, 나비가 되는 기회를 영영 갖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제임스 홀리스는 마흔 인생의 중간 항로에서 사춘기가 확장된 채 성인이 되었던 시간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내면에 남아 있는 아이를 찾고, 부모와 분리시킨다. 혹시 내면 아이가 유년기에 겪은 상처로 힘들어한다면 반드시 치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를 홀로 세우고,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두 번째 성인기의 시작이라고 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완전히 홀로 서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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