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부모가 되어야 해요

안나 카레니나

by 무쌍

잘 지내다가도 어딘가 꽉 막혀 일상이 회복되지 않는 날 한 번씩 온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믿고 내일로 향하지만, 등 뒤에 과거는 나를 망설이게 한다. 그럼 난 똑같은 처방을 반복한다. 스스로를 이해하며 내 힘으로 해결하는 방식, 그건 고전을 읽는 일이었다. 이번엔 좀 두꺼운 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불행한 주인공을 만나고 싶었다.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왜 우리는 모두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할까?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온 첫 문장이다. 아름다운 안나는 주목을 받는 여인이었지만, 등 떠밀듯이 부모가 정해준 나이 많은 백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백작부인으로 안정된 삶을 위해선 아들을 낳아야 했다. 그녀는 귀족사회 일원으로 신을 잘 맞추며, 부모가 살아온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의지대로 한 남자를 사랑을 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갖춘 그녀는 누구든 사로잡을 만큼 매력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그런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런 그녀에게 몰입된 감정은 사실 내 상황 때문이었다. 른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이 없던 내가 들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혼을 해도 좋으니 결혼은 해봐야 하지 않겠니?"

"네가 시집을 못 가니 동생들 혼사길이 막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는 소설 속의 안나처럼 부모가 정해준 상대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있었다. 결혼은 나를 어느 정도 가족들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해 주었다. 래도 한 번씩 가족에게 나를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늘 기회가 오길 기다렸던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선 난 이런 말을 들었다.


"무슨 걱정이니? 남편도 있는데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애들 학교 가면 너도 밥벌이는 해야지. 다들 애 키우며 돈 벌고 살잖아."


엄마에게 핀잔을 듣는 건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에게 하는 다정한 안부가 아니라 치가인 남편을 맞춰주고, 그를 위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족사회의 대물림되는 규범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는 이유였지만, 그녀의 행복은 타인들의 시선 안에서 표현되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안나는 부유층이라 치장하고 먹고사는 일에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가난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가 겉으론 오만하고 침착하지만 그건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만 하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거짓으로부터 나는 자유롭고 싶었만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편과 아들을 버리고 애인에게 가는 일은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색 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상류층의 사람들과 똑같이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또다시 자신과 멀어져 버린다. 안나는 결국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안나의 비극은 그저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의 죽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안나도 불행하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긴 쉽지 않았다. 세상은 훨씬 단단하고 끊기 힘든 통념과 관습이 그물망처럼 씌워져 있었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녀가 만나 자녀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삶을 모두가 누리는 것은 아닌 듯하다.

불행한 가정은 고성이 오가거나 폭력이 난무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의 자유와 행복보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대물림되는 관습이 지배적인 경우다. 불행하게도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역할이 있다.


아빠에겐 엄마를 대신할 아내 역할을 엄마에게는 자식이지만 정 반대 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 거짓된 역할은 비밀스럽고 어두워서 아이를 혼동하게 만든다. 이는 글도 배우기도 전에 어디도 소속되지 않는 불안감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 두려움이 생긴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믿어버린다.

실 아이는 행복한 가정이 뭔지 경험한 적이 없으니 자신이 불행한지도 모른 채 자란다. 그러다 다른 가족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내 가족과 다르다는 걸 알기 시작하면 더 깊이 우울감이 자리 잡는다. 두려움이 많으면 어둠이 무서운 건지, 환한 때문에 눈부셔 불편한 건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스로 커가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밝은 빛을 향해 간다고 믿는다. 어두운 곳에선 빛이 더 잘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때는 부모님을 떠나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을 보듯 멀리 거리를 두면 안심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휴대폰은 경보기처럼 아무 때나 울리며 나를 긴장하게 했다. 이 나면 불을 끄는 일은 늘 반복되었지만, 불은 내가 지른 것이 아니었다. 더는 못하겠다고 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자백하듯이 내 비밀을 세상에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거짓에서 자유울 수 있듯 했다. 리고 딱 한 번은 가족들을 실망시켜야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침묵'이었다. 내가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건지 단서도 남기지 않고 그냥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내게 전화하지 않을 거란 걸 왜 몰랐을까? 내가 연락하지 않아도 가족들은 날 찾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은 잠잠한 채 지낼 수 있었다. 멀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끊을 수 없는 가족이란 죄책감은 늘 나를 멀리 못 가게 했다.

죄책감을 버리려면 '원망'이 필요했다. 화를 낼수록 죄책감을 멀리 할 수 있었지만, 쏟아내는 원망은 금방 나를 질리게 했다. 아무리 깨끗한 종이 위에 글을 쓰려고 해도 죄책감과 원망이 섞인 감정들이 더럽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손이 지저분해질까 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울컥 거리는 감정이 들면 '또 생각났구나.'라고 스스로 타일러야 했다.

비누 거품으로러워진 손을 씻듯이 글을 쓰며 감정들을 떼어냈다. 나를 허비할 만큼 했으니 더는 과거를 붙들고 싶지 않았다. 처음 쓴 글에선 악취가 나고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았지만, 고치고 고치는 일은 나를 안심시켜 가며 서서히 불행들로부터 선을 긋게 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모성애가 어떤 건지 충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든 감정은 복잡했다. 유년시절에 내 가족과는 완전히 다른 가족 안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음으로 나는 가족들의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안전한 집안에서 쾌적하고 숨쉬기 편안한 공기와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한 가정이 뭔지 알듯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부부가 불행을 가져왔다면, 그 이유가 자식 때문은 아니다. 내 부모님도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각자 다른 부모에게 길러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모의 부모에게 영향을 았고, 대물림되는 유전의 씨앗은 정상적인 성장 했겠지만, 어느 대엔 불행으로 피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부로 만난 그들이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면 비슷한 불행은 또 대물림된다. 그런 부모 사이에서 자란 자식이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누구도 나의 부모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자신에게 부모가 되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엄마, 아빠처럼 안부를 묻는다.


" 오늘은 어땠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들었겠네.

집안일하느라 곤하겠다.

이만하고 좀 쉬어."

종지나물꽃(2022.04 @songyiflower인스타그램)

꽃같이 스스로 피어나야 하는 아이에게는 사랑으로 조건 없이 바라봐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오래전 나도 부모님께 내가 꽃 같은 자식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내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묻고 싶었다.

꽃은 스스로 피어난다. 부모처럼 보살피는 손길이 없어도 야생의 꽃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다. 처를 가진 어린 시절의 나를 달래준다고, 정작 내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나도 엄마가 필요했다. 둘 모두에게 엄마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과거를 '침묵'하는 시간이 익숙해질수록, 아이들에게 더 나은 엄마가 될 기회는 늘어났다. 지금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도 비슷한 안부를 묻는다.

"학교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오늘은 어땠어?

"잘했네. 고생했어."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이렇게 북돋아주는 말이 시시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은 어렵고 읽는데 오래 걸렸다. 다시 읽은 <안나 카레니나>는 새로운 문장에 밑줄을 긋게 했다. 여러 번 책을 보는 일은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씨앗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씨앗에서 핀 꽃은 피었던 꽃이 아니라 새로 피는 꽃이 아니던가. 내 삶을 새롭게 바꿀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내기 위해 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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