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 반납 문자가 왔다. 한두 쳅터만 읽고 나면 될 책이었다. 그런데 다시 열어보기가 망설여졌다. 책에 어떤 결론이 쓰여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책에 쓰인 대로 나도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면에 구멍이 났다는 걸 알고 나서 심리학 책을 많이도 봤다. 인생의 흠결이 없는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외면해왔다. 인정하기 전에 확실하게 하고 싶었으니까. 유전자의 업보는 질병처럼 대물림되고, 나쁜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심리학자들이 건넨 해결방법 대로 삶을 바꾸기가 보통 노력으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불가능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지러운 듯 일상이 흔들릴 때마다, 관련된 책들을 찾았다. 답을 알고 있으니 언젠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책에 쓰인 대로 실천해보지 않으면 그 책은 그냥 광고지면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보다, 사정을 잘 아는 남편에게 하소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감정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생각보다 쓸모가 많았다.
오래전 직장동료가 생각났다. 남자 친구랑 헤어질지 말지 고민하는데 누가 조언을 해줬다고 했다. 종이 두장을 준비하고 한 장엔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후회할 점을 쓰고, 다른 한 장엔 남자 친구와 계속 사귀면 후회할 일을 쓰는 것이었다. 숫자를 매기면서 쓰다 보니 밤을 지새우며 쓰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남자 친구와 헤어질 이유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남자 친구의 외모, 인품과 조건, 직업이 완벽한데 왜 헤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지만, 그 동료는 그런 조건들은 단 몇 줄 만에 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쓰다 보니 헤어져야 할 이유가 분명히 보였다고 했다. 그때 난 글쓰기의 대단한 힘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감정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피곤해'라고 말하는데, 엄마가 뭐라고 대답해주면 좋을까?
"그러게 학교 다녀오느라 힘들었겠네, 맛있는 거 해줄게!" 일 것이다.
일을 마친 남편이 "피곤하네."라는 말에도 "오늘 일이 많았나 보네, 고생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남들도 다 그래. 공부하는 게 쉬운 줄 알았어? 공부가 쉽냐."라며 지친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무시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남편에게도 학교라는 단어만 빼고 넣으면 똑같다. 둘째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좀 심했다. 그래서 자주 만나는 지인에게 "산후 우울증은 두 번째도 마찬가지네요. 자꾸 우울해지고 힘드네요."라고 했다. 물론 그 지인이 평소 털어놓는 힘듦을 많이 들어주었으니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답은 "몸이 편해서 그래요. 몸이 힘들면 그런 생각도 안 들어요."였다.
한순간에 내 우울한 감정은 푸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배웠다. 불편한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대답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냥 "그렇군요. 힘들겠어요." 그것이 뿐이었다. 자신은 위로를 바라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듣는 것을 거부한다. 배부른 말을 한다며 조언 아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글을 쓰다 보니 자꾸만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미 많은 책에서 애절하고 힘든 사연들은 구구절절 넘치는데 내 사연까지 떠들기는 싫었다. 대신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마도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감정의 언어들이 었을지 모르겠다. 감정이 솔직하지 못하면 글을 써지지 않았다.
목련나무 겨울눈 꽃이 없는 겨울 동안 그것들을 써보려고 했는데, 벌써 계절은 봄을 향해 간다. 산책로에 목련나무는 겨울눈 속에 봄을 준비해두고 느긋해 보였다. 툭툭 털어내듯 글을 쓰고 목련처럼 새로운 꽃을 피우길 바라는데 말이다.
망설이다 보니 나는 목련보다도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