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와로를 만나러 런던으로 간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여행을 간다. 첫 목적지는 터키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에 가면 오르한 파묵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곧장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출발했던 기차역으로 갈 것이다. 터키어를 할 줄 몰라도 머릿속엔 근사한 탐정 포와로 이야기가 있으니 장소에서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차를 타고 영국 런던으로 가면 포와로가 살던 아파트를 찾아갈 것이다. 벨기에 출신인 포와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유창하지만, 나는 겨우 영어 몇 마디로 인사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 상상 속에 벌어진다. 영화로 유명해진 노팅힐 거리나 템즈강변과 시계탑, 런던에 갈 곳은 자꾸만 늘어간다.
퀸 메리 가든에 가서 장미들을 실컷보고 유명한 정원들과 정원박물관까지 돌아보려면 꽃이 많은 계절에 가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남편과 아이들이 내 취향을 모두 따라와 줄까 모르겠다. 엄마가 되고 나선 혼자 여행은 꿈도 안 꾸니 대신 가족들이 감수해야겠지... 가족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집 식탁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에 달력을 보며, 어디론가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다는 기분을 따라간 듯했다. 답답한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자마자 또 연휴가 코앞이었다. 쉼이 없는 일상에 잠깐 런던을 다녀온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설 명절을 앞두니 설특집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명절 연휴엔 어떤 영화를 하는지가 관심사였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요즘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스마트폰으로 보는 시대가 왔지만 말이다.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 <오리엔탈 특급 살인>를 스마트폰으로 봤다. 극장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장면에서 서글퍼졌다. 영화는 작고 귀여운 소녀의 죽음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지옥으로 몰고 간다.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지쳐버린 피해자들이 법망을 피해 도망간 죄인을 찾는다. 그리고 가해자는 치유가 필요한 상처받은 영혼이었다는 것에 먹먹하고 머리가 아파졌다. 사악한 한 사람이 많든 불행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 흔드는지 또다시 느껴야 했다.
영화는 또 봐도 재밌었지만 아주 조금 아쉬웠다. 드라마로 제작된 <오리엔트 특급열차> 속 데이비드 서쳇의 포와로가 나를 더 오싹하게 했던 것 같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두 삶을 살아갈 사람들을 뒤로하고, 포와로는 피해자의 치유를 선택하는 것으로 포와로 답지 않게 사건을 종결한다. 평소 감정에 치우지지 않는 그가 죄인을 법의 심판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뒤로하며 그는 알 수 없는 눈물을 보였다.
냉철하고 완벽한 수사에 대한 자신의 흠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었을까? 어떤 자도 살인에 대해서 관대할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그였다. 그 앞에선 무서워서 거짓말도 못할 것 같지만 왠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탄 당신도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으니, 당신도 치유가 필요했을 거예요.'라고 말이다.
범인이 잡히고 마땅히 벌을 받았다면 사건 이후에 더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사건은 그 자체로도 참혹하지만, 시계를 과거로 돌릴 수 없다면, 죄인이 벌을 받아도 슬픔은 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진지한 수사물 영화 한 편 때문인지, 내게 인생의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느닷없이 들이대는 것들을 잘 넘기는 것뿐이었다.
포와로가 다음 사건 해결을 하러 떠나듯, 몇 가지 일은 연휴가 끝나며 해결되긴 했다. 나는 후회할지 모를 선택을 했고, 예전의 나답지 않은 결론을 냈다. 설날 연휴는 유난히 길고, 몸은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은 다시 런던이다. 항상 걱정을 미리 데려오는데, 걱정 대신 근사한 미래를 떠올리니 진짜 여행하는 설렘도 느껴졌다. 런던에 온 나는 포와로를 어디서 만나는 것이 좋을지 고민 중이다. 포와로도 장미꽃은 좋아하니 장미정원에서 만나면 좋을 듯싶다. 기분 좋게 장미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런던 여행 중이라고 인사하면 뭐라고 할까?
"아! 런던 여행을 오셨다고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마담!" 신사인 그는 내 인사를 친절히 받아주고는 재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수다가 좋은 나는 할 말이 많지만 말이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점점 더 나는 통이 큰 '긍정' 엄마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긍정이 정답은 아니었다. 매사 긍정하는 성격이 오히려 일을 키우기도 했다. 그래도 매번 좋을 수 없고, 나쁜 일을 받아들이는 건 어른이 되어도 쉽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실수나 실패가 삶을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고, 생각을 바꾸다 보면 어느새 지나가 버린다고 말이다.
글쓰기에 빠진 나는 런던을 자주 가게 된다. 머릿속은 늘 수많은 작가와 인물들이 있는 런던을 걸어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