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사러 가는 클라리사를 만난 버지니아 울프와의 대화

댈러웨이 부인

by 무쌍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건 흰머리와 주름만이 아니었다.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매년 늘어나는 나이는 겹겹이 시간을 합쳐놓으며, 자꾸만 인생의 깊숙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다.


잘 지내다가도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갑자기 내 모습이 어색하고, 낯선 곳에 있는 듯 어리둥절진다. 증상이 생긴 건 아마도 결혼하고 나서 인 듯싶다.


살림을 하는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내다 보면,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왜 여기서 접시를 닦고 있는 지?', 청소를 하다가 '이 잡동사니는 언제부터 내가 갖고 있던 거지?' 이런 질문들은 내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묻게 되는 자가 검진 같은 것이었다. 설거지가 거의 끝날 때쯤, 정신을 차리고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긴다. 청소가 끝나 말끔히 정리된 거실을 바라보며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역할은 여러 즐거움과 보상을 안겨주었지만 내가 누군지 자꾸만 잊어버리게 했다. 살림은 재미가 있긴 하지만 반복이다. 기계처럼 일하는 나를 알아챌 때마다 자꾸만 과거의 나를 불러오게 한다. 나만의 방이 있던 시절은 알지 못했다. 방이 사라지고 나서야 내 이름이 없어단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이십 대에 나는 순진한 허영심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첫 책 <댈러웨이 부인>을 샀던 것 같다. 꽃을 사러 나간 중년의 댈러웨이 부인을 따라 걷는 듯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절반도 못 보고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어려운 외국어처럼 해석이 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책장에 새책처럼 꽂혀 있는 <댈러웨이 부인>을 다시 펼치는 순간 그 이유를 알 듯했다. 이제야 나도 주인공과 비슷한,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댈러웨이 부인의 나이가 될 것다.


설의 시작은 이러했다. 정치인의 아내인 그녀는 부유한 생활을 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여자였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이 가서 꽃을 사 와야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가 꽃을 사러 나간 건 아름다운 향기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위한 저녁 파티에 쓸 장식용이었다. 러나 꽃을 사는 핑계로 집 밖으로 나온 듯,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런던 거리는 전쟁 끝에 우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애써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적당히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들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산책을 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만난 듯 알 수 없는 문장들이 가늘고 섬세하게 늘어졌다. 그녀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장면 사이에 끼어드는 클라리사의 묘사는 과거인지 현재인지 헷갈리게 했다. 그러다가 사려심 있고 인생의 깊이를 다 아는 댈러웨이 부인이 독백이 등장하면, 그나마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기분이었다. 지니아 울프가 쓴 의식의 흐름은 문장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만큼 개인적이지만, 결혼한 여자라면 어딘지 모르게 공감되고 겹쳐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에게 뭔가 말을 걸기보다는 자꾸만 웃어주고 북돋아주고 어졌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인생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는 줄 알았다.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인 양 큰 실수를 하는 것 말이다. 어려서부터 여자가 결혼을 잘못하면 벌어지는 일들, 무능한 남편을 두면 고생하는 여자의 인생을 일일드라마처럼 누군가에게 세뇌당했다. 혼자 살아보려고 했지만, 또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남들이 하는 일을 해보지 못한 능력 없는 사람이란 말도 들어야 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싶었지만, 클라리사처럼 나도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정치인은 아니지만 세상일이 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녀처럼 꽃을 사러 나가지는 않지만, 산책을 나서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작가로 인지도가 높다. 성별을 불문하고 작가라면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단 그녀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할 만큼 그녀가 예리하고 정확한 사고를 가졌다는 걸 충분히 증명한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여성이 참정권이 없었다. 여자는 도서관 출입도 제한을 받았던 시대를 살던 그녀는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하며 열악한 여성 작가의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철 카슨은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의사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니 불과 100년 전의 억눌린 여성의 삶이란 강제로 눌러 버린 꽃잎처럼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복오빠의 몹쓸 짓에 망가진 꽃다운 그녀 마음은 어머니의 죽음과 형제의 죽음으로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렇지만 글기와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은 그녀가 여러 편의 작품을 남길 수 있게 힘이 되어 주었다. 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치료되지 않은 채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당시 정신과 치료는 지친 참전용사들을 위한 것으로 침대에 누워 잘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 같은 것이었다. 남편은 그녀의 정신 치료를 원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그러했던 걸 보면, 그 당시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치료는 달리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무엇을 되찾으려고 했을까? 펼쳐놓여 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며, 전원의 하얀 새벽 광경이라도 그려보겠단 말인가.
이제는 두려워 말라,
뜨거운 햇볕도, 혹한의 눈보라도.
오랫동안 세상에서 경험을 쌓아 가노라면,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속에 눈물의 샘이 자라기 마련이다.
-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작가는 서점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나 보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런던의 해저드 서점 진열장 앞에서 젊은 클라리사의 기억으로 스며들게 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클라리사에게 투영시킨다. 댈러웨이 부인이 된 그녀가 꽃을 사러 가는 길에 문득 떠오른 기억 속에 열여덟 젊은 날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땐 진정한 사랑을 원했고, 자신의 꿈을 함께할 누군가를 그리며, 젊음이 주는 에너지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날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의 불행을 벗어던지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떠나왔다는 걸 털어놓고 싶었다.


"저는 전철을 탈 때마다, 고향집을 떠나온 날이 떠올라요. 김포공항에서 탔던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기계음을 내는 지하철 내부가 선명하게 느껴지거든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는 해방감이 들었어요.

그곳에서 나는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나는 뭘 하게 될까?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수없이 생각했어요.

막상 떨어지고 나오니, 그곳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남겨진 가족들도요. 어렴풋이 예전의 감정들이 되살아나서 나를 자극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지 말이에요."



소설엔 시계와 꽃 반복해서 나온다.

빅벤의 시계 소리는 정해진 일과를 챙겨야 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일상처럼 자꾸만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같았다. 빅벤의 시계가 울릴 때마다 그녀에게 집으로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는 이유가 그러하듯 말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잘 알고 있는 듯, 꽃은 사람들이 등장할 때마다 온다. 녀는 꽃 같은 사람들이 있는 런던을 사랑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 조각들을 찾는 일을 이 좋아했던 것 같다. 하루 동안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모습을 찾은 듯, 소설 끝엔 살아갈 희망을 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기억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조각처럼 놓인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는 한꺼번에 읽긴 멀미가 났다. 읽는 동안 나도 지친 하루를 보내는 듯 고단했지만, 그녀와 긴 이야기를 나눈 듯 익숙해졌다.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댈러웨이 부인>을 읽은 건,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을 잘 넘긴 듯 해방감을 주었다.


댈러웨이 부인, 젊은 클라리사를 따라 책 속에서 하루를 보냈더니, 그녀는 내게 꽃다발을 선물처럼 안겨주었다. 꽃 향기는 프리지어 꽃만큼 그윽해서 마음까지 향기로워졌다.

나도 클라리사처럼 희망을 얻고 다시 글을 쓰는 나로 돌아간다.

삶의 깊은 슬픔과 사랑을 알고 있는 아름다운 댈러웨이 부인을 쓴 작가가 아픈 어린 시절을 갖고 있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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