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으로 부자가 된 제인 에어를 만난 브론테와의 대화

제인 에어

by 무쌍

꽃이 없는 겨울은 지루하다.

꽃 사진을 찍을 기회가 없어 한가한 나와는 다르게 귤밭에 사는 그녀의 정원은 보물창고처럼 겨울에도 꽃이 핀다. 얼마 전엔 수선화가 가득 핀 사진을 보여었는데, 귤나무 아래 총총 꽂아둔 꽃다발처럼 무리 지어 핀 수선화가 탐스러웠다. 아빠의 귤밭과 창고를 똑 닮은 그녀의 귤 과수원은 이십 년도 넘은 기억을 몽땅 소환시켜 주었다. 계절마다 보았던 꽃들이 그 과수원에서 똑같이 피어났다. 사진 속의 꽃을 따라 수없이 오갔던 예전으로 돌아간 듯 즐거워다.


꽃을 찍으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는 육아로 막힌 외부생활을 활기차게 바꿔주었다. 소박한 사진 한 장에도 자연을 예찬하는 마음은 비슷했고, 작은 꽃봉오리도 금방 알아보는 눈을 나눠가진 듯했다.

을 찍기 전엔 고향만 떠올리면 우울해졌지만, 꽃 귤밭의 그늘진 기억보다는 생화를 갖고 놀던 기억들이 더 생생히 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들을 낳는 며느리가 대접받던 시대였다. 집안에 아빠의 과수원을 물려받을 들이 태어났고, 아빠는 아들 이름 대신 '상속자'라고 불렀다. 내게도 '너를 큰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했지만, 맏이가 딸로 태어난 것이 아쉬워하는 소리였다.


아빠가 내 곁을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몰랐다. 탱자나무에 접붙이는 법이나 귤나무 가지치기하는 법, 분재 화분 관리하는 법은 제대로 배워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 어깨너머로 그냥 보기만 었다. 가 나무나 풀의 이름을 물어볼 때면 아빠는 식물 사전처럼 늘 알고 계셨다. 가끔씩은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뭔가를 더 가르쳐 주셨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야생화들이 피는 귤밭이 좋았지만, 정작 상속자는 세련된 도시를 좋아했다. 하지만 귤 과수원은 상속자라고 불리던 아들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처분되었다. 아빠도 과수원에 있던 집과 귤밭, 창고들도 모두 내 곁에서 떠나 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가 딸이라서 귤밭이나 창고 같은 물려받지 못한 유산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었다.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유년시절을 추억할 아빠도 과수원도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기만 했다.



영국에 살던 두 자매가 있다.

언니는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 동생은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는 흔히 브론테 자매라고 불린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자매들을 병으로 잃은 불후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그녀들이 살던 1800년대는 여성이 사회생활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브론트 자매는 이름을 숨기고 자비를 모아 시집을 출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 후에도 포기하지 않은 자매는 각자 소설 작품을 써내는데, 샬롯 브론테는 컬러 벨이란 남성 이름으로 <제인 에어>를 출판해서 곧바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작가로 인정받은 브론테는 런던을 오가며 문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기쁨을 만끽했지만, 그녀의 삶은 서른여덟 너무도 짧게 끝이 나버렸다.

제인 에어는 샬롯 브론테의 자전적인 소설로 출간 당시 원제목엔 자서전이란 부제목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제인은 상에 가장 불행한 모든 것을 모아놓은 듯 슬픈 아이였다.


어린아이들은 느낄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분석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석한다 해도 그 결과를 말로 표현할 줄 모른다. 나는 처음으로 단 한 번, 내 슬픔을 알려서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대로 놓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잠시 불안해하며 주저한 끝에, 충분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최대한 진실한 대답을 짜냈다.
"먼저,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고 오빠도 여동생도 없어요."


제인은 중요한 결정할 때마다 망설이긴 했지만,차분히 자신의 소신을 따랐다. 어린 제인과 같은 나이였던 내가 강압적인 어른들 틈에서 말을 못 하고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난 제인처럼 단단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할 말을 잘 못하고, 이불속에서 구시렁거릴 줄 만 알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 나도 이제 내 목소리로 말을 하 시작했다.



샬롯 브론테 자신을 그대로 투영시킨 '제인'은 불행하지만 불행하지 않다. 자신의 불행을 긍정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던져버릴 단호함이 있었다.


" 제인, 당신은 당당해요. 그런 당신이 존재한다는 건 저겐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불행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또 현실적인 과제에 최선을 하잖아요. 어쩌면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배울 것이 남은 기분이었어요.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질 못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요. 나를 구해줄 누군가가 짠하고 나타나거나, 어려운 상황을 뒤집어줄 도움을 누가 줄 거라고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편안해질 때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결국은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나는 내가 선생과 헤어진 것을 슬퍼하고 그 상실감을 어떻게 메울까 고민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끝맺고 고개를 들어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퍼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이 떠나자 나는 차츰 변하고 있었다. 내 정신은 템플 선생한테서 빌려 온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선생님 곁에 있을 때 숨 쉬고 있던 평온한 공기는 템플 선생이 가져가 버리고, 나는 이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평온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평온할 이유가 사라졌다.

제인은 불행이 익숙해서일까?

그날 밤 제인은 곧바로 새 출발을 준비한다. 신문광고를 내고 일자리를 직접 구했다. 각별하게 의지했던 스승이 떠나자 그동안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랬다. 자신의 선택에 걱정과 불안으로 누군가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새롭게 다짐하는 일이 제인은 반나절 걸렸다지만, 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듯하다. 어쩌면 글쓰기가 그 시간을 빨리 당겨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브론테는 <제인 에어>가 출판되자마자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부와 성공을 이뤘지만, 제인은 다른 이유로 부자가 되었다. 바로 유일한 혈육이었던 에어 삼촌이 남긴 전재산을 상속받은 것이다.


독자여, 한순간에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근사한, 아주 멋진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곧바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마음껏 즐거워하기 힘든 법이다. 그리고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짜릿하고 황홀한 기쁨을 주는 일들이 있다.
말로만 듣던 삼촌이 죽었다. 나의 유일한 삼촌을 만나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돈은 나한테만 왔다. 나와 기뻐하는 가족에게 온 것이 아니라 혈혈단신인 나에게 온 것이다.

신기했다. 제인이 부자가 되었다는 걸 작가와 함께 기뻐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보다 가족이 그리웠던 그녀지만, 단숨에 부자가 될 수 있는 상속금은 신분 때문에 포기했던 사랑을 단숨에 되돌려 놓을 수 있게 했다. 제인은 신을 사랑하는 로체스터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동화책의 결말처럼 인 에어의 자서전은 행복하게 끝이 난다. 지독한 불행이 현실이라면 소설의 끝은 언제나 행복이 결말이라면 좋겠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샬롯 브론테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 작가 개스켈이 <샬럿 브론테의 삶>을 전기로 남기도 했는데, 이로써 샬롯 브론테의 두 가지 인생이 책으로 남았다.


하나는 상속으로 자립하고 사랑에 성공한 소설 주인공 제인 에어, 두 번째는 불행했지만 작가로 성공한 샬롯 브론테다.


" 가는 책 속에서도 꿈꾸는 삶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군요. 뭐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작가가 만든 소설 속의 삶과 글을 쓰는 작가의 삶 모두 부럽기만 하네요"

푸념하듯 중얼거리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샬롯 브론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을 쓴다면서요. 럼 당신의 이야기를 쓰면 되겠네요."


그리고 나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주인공은 아닌 것 같아요. 귤밭이 내 유일한 고향이지만 주인은 내가 아니었듯이 말이에요."

책을 다 읽고 나니 로체스터게 제인 에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자립했어요. 저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제인 에어, 당당한 그녀를 흠모하면서도 매사 자신 없어하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말이었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을 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감을 갖는 것이었다.

지금껏 돌아가신 빠에게 상속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살아왔지만, 사실은 꺼내 쓸 줄 모르고 내 안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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