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과 길버트를 만나게 한 몽고메리와의 대화
레드먼드의 앤
벚꽃이 피었다.
보도블록 위로 튀어 오른 나무뿌리는 금방이라도 차도로 뛰어들 듯 아찔했다. 땅속에 자신의 비밀을 다 숨기지 못한 것일까? 나무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오래된 가로수에 떨어뜨린 사연은 연분홍 바람으로 도로 구석을 꼼꼼하게 채우고 있었다.
왕벚꽃나무는 제주가 원산지로, 제주에선 가로수로 심어진 곳이 많다. 꽃이 필 때마다 제주 전농로엔 왕벚꽃축제가 열렸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집이 그 근처였는데, 벚꽃이 필 때마다 동네가 사람들로 꽉 차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늦은 밤까지 구경꾼들은 쉽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엔 동네 사람들만 오가는 조용한 길이지만 벚꽃은 어김없이 사람들을 불렀다.
뭐가 바빴는지 집 앞인데도 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사진 찍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벚꽃이 날리는 풍경 속을 지나가는 아이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감수성이 풍부하고 빨간 머리를 한 소설 속의 아이를 자주 떠올렸던 것 같다. 초록 지붕 집으로 가는 길, 매슈 아저씨와 마차를 타고 가던 앤이 벚꽃을 보며 중얼거렸던 말들을 따라 해보려고 했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나는 더 고아처럼 사랑을 그리워했다.
꽃잎이 만개하면 꼭 봄비가 내렸는데, 벚나무와 봄비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보였다. 벚꽃은 봄비를 만나면 곧바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비가 쏟아지는 벚꽃나무 아래를 우산 속에 숨어 느릿느릿 혼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봄비가 만든 물 웅덩이마다 벚꽃은 물놀이하듯 귀엽게 움직였고, 걸을 때마다 신발 바닥엔 꽃잎이 스티커처럼 달라붙었는데, 꽃잎이 여러 겹 뭉쳐지면 뚝 떨어지고, 다시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어가듯 또 달라붙었다. 길 따라 내가 만든 벚꽃 잎 발자국이 나를 졸졸 따라온 듯 느껴져, 남겨두고 가기 미안한 날이 많았다.
나도 앤처럼 뭔가를 머릿속으로 지어내며, 온갖 공상으로 알 수 없는 놀이를 즐겼던 것 같다. 아무도 내 존재를 증명해 주지 않았던 십 대의 감수성은 봄과 함께 피었다 시들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자신이 자란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자연을 그대로 자신의 책에 옮겨왔다. 몽고메리의 어린 시절 섬에서의 추억은 책 속 아름다운 배경으로 등장했고, 그곳에서 앤과 길버트의 러브스토리를 탄생시켰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몽고메리는 "글을 쓰고 싶어 좀이 쑤시는" 기질을 갖고 있어서, 메모하거나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무엇이든 써놓았던 그녀가 우연히 어릴 때 남겨둔 메모에서 '어떤 농부가 양자를 삼기 위해 남자아이를 고아원에 부탁했는데, 일이 잘못되어 여자아이가 오게 되었다.'란 문장을 보고 탄생시킨 이야기가 바로 <빨간 머리 앤>이었다.
완성된 소설을 출판사에 보냈지만, 어디도 받아주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은 그녀가 2년 뒤 미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서 책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대단히 성공한 그녀는 성장한 앤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후속 편을 연이어 쓰게 되었다. 앤의 눈을 사로잡는 수많은 야생화들도 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작가로 성장한 앤의 이야기가 훨씬 더 끌렸다.
"저는 당신처럼 낭만적인 상상력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낙서처럼 끄적이는 일은 습관처럼 해왔답니다. 전 앤 셜리가 천진난만하고 감추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채로 어린 시절을 보낸 걸 부러워했어요. 전 그런 감정들을 말할 줄도 표현할 줄도 몰랐거든요. 앤이 어른들의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라면 전 정 반대였거든요. 자신의 재능으로 소설을 쓴 앤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데 상상력은 어디서 데려와야 할까요? 소설을 쓰는 기분이 뭔지 궁금해요."
앤이 소설 때문에 고민하는 장면들을 발견했다.
"내 소설의 줄거리를 생각하고 있었어. 다이애나.
아직 몇 장 쓰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잡았어. 그동안 줄거리를 생각하면서 지냈지.
2주일 동안 소설을 쓰면서 앤은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기분이 우울하기도 했다가 즐거워지기도 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환희에 취해 있다가도 반대편 등장인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절망에 빠져 있곤 했다.
나한테 에이버릴은 살아있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다른 이름을 붙여 보려고 해도 다시 에이버릴이 되어 있는 거야.
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시적인 말들이야말로 에이버릴 같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앤은 다음에 소설을 쓰게 되면 누구에게도 비평해 달라고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기운만 빠질 뿐이니까.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레드먼드의 앤>
앤 셜리는 자신의 이름 끝글자에 (e)를 꼭 붙여달라는 야무진 소녀였다. 그런 그녀지만 소설 쓰기는 쉽지 않은 듯했다. 소설 주인공 이름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걸 보니 소설가는 아무나 되는 건 분명 아니었다. 난 앤처럼 자신의 소설을 보여줄 용기는 없을 것 같다. 몰래 써놓은 소설 조각들이 어느 노트에 있는지 알면서도 하나로 맞추는 건 아무래도 못하겠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 이름을 붙이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제대로 쓰려면 앤 셜리처럼 주인공 이름부터 정해놔야 하는 걸까?
3부작으로 된 책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 마지막 <레드먼드의 앤>에 앤과 길버트가 나오는 장면을 훑어보고 싶어 펼쳤다가 끝까지 읽고 말았다.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전 앤이 작가가 되는 것도 좋았지만, 앤과 길버트를 만나게 한 줄거리가 맘에 들어요. 두 아이가 한 마을에서 자라며 각자 어려움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길을 찾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걸 그들을 보며 하는 말인가 봐요. 그리고 당신은 앤에게 작가라는 꿈과 함께 선물처럼 길버트를 만나게 해 준 것 같아요. 친구든, 가족이든 자신을 온전히 응원해 줄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저도 알 것 같거든요."
앤이 나직이 말했다.
" 저 작은 계곡 너머 푸른 아지랑이 속이 '꿈이 이루어지는 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니, 앤?" 길버트가 물었다.
"당연하지 누구나 그렇잖아.... 틀림없이 굉장히 아름다울 거야."
길버트가 천천히 말했다.
"내게는 꿈이 있어,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자주 있기 했지만, 계속 그 꿈을 가지고 있지.
.....
서로 기다리면서 일하고 꿈꾸면 행복할 거야. 아, 이제 꿈은 정말로 달콤할 거야.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레드먼드의 앤>
백신 주사를 세 번이나 맞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예상보다 덜 아팠다. 꽃이 피는 봄부터 맞고 싶었지만 백신이 먼저였다. 몸은 축 쳐지고 근육통과 두통이 오갔다. 답답한 집안 생활은 봄꽃이 피면 활기를 찾을 듯했지만, 세상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듯하다. 야생의 자연을 만끽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저 멀리 캐나다의 작은 섬에서 온 몽고메리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그녀의 책은 우울한 일상을 밀어내고 내일을 낙관할 용기를 주는 듯했다.
집 앞 공원에 벚꽃나무를 보니 가지마다 겨울 눈이 촘촘하게 올라와 있었다. 딱딱한 가지에 돋아난 가시 같은 '겨울 눈'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태양 빛에 스르르 녹아 이파리가 되고 향긋한 내음을 내는 꽃잎이 될 날이 곧 멀지 않은 듯했다.
미운 구석만 갖고 있는 줄 알았던 가시 돋친 나무가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벚꽃나무로 변신할 수 있다면, 나의 이야기도 사람들이 보러 와줄까?
오늘 하루도 겨울눈처럼 은둔하듯 준비하면, 꽃봉오리가 되어 피어날 꿈같은 날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