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딸기가 도와주는 겨울나기

겨울나기(윈터링 Wintering)

by 무쌍

딸기가 돌아왔다. 몇 주 전까지는 눈인사만 했는데, 요즘은 맛이 좋아 보이는 걸 고른다. 장 보러 갈 때마다 딸기 앞을 서성거리면 '딸기를 살까? 말까?' 고민한다.

딸기는 무르지 않은 것만 고르면 실패는 없지만, 바닥에 가려진 무른 딸기를 보고 싶지 않아서 깐하게 고심해서 선택한다.


첫 애를 가졌을 때였다. 거의 먹지 못한 입덧은 다들 천차만별이라더니 나는 붉은 것만 먹고 싶었다. 잘 익은 토마토, 사과, 딸기였다. 봄에 태어난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겨울나기를 하고 나온 셈이니, 겨울 내내 딸기 신세를 참 많이 졌다.

그래서일까? 딸기를 보며 가끔씩 속이 울렁거린다. 입덧하는 내 뱃속에 있던 아이는 딸기를 입도 데지 않지만, 딸기를 먹는 순간 나는 더부룩했던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과일 가게에 일 년 내내 파는 건 수입 바나나 정도일까? 지금은 딸기가 주인행세를 하지만, 과일 매대엔 자연이 내어준 대로 수확한 과일들이 진열된다. 누구도 영원히 일인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 일 것이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껄껄거리던 아버지도, 큰소리로 '밥 줘.' 하던 시아버지도 떠나셨으니 남은 건 빈자리의 허전함이었다. 이렇게 빨리 쓸쓸한 명절을 보낼 줄을 몰랐다. '어디로 든 갈 명절 휴가'를 익숙하게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리 듯하다.


여전히 겨울이다. 초록 싱그러움이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은 덩어리처럼 굳어 눈이 날리던 날의 로맨틱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얼음처럼 굳어있던 눈이 간밤에 내린 비로 녹았다. 이 사라진 화단에 초록색 잎들이 언제 돋아났는지 파릇한 기운이 돌았다.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야생초들 보니 봄이 코앞인 듯 느껴졌다. 좀 더 가까이 가보니 아직 꽃송이는 보이지 않지만 봄까치꽃이었다.

지난여름 유홍초와 넓은잎 나팔꽃이 피었던 담장 아래 참새들이 모여 있었다. 눈이 녹은 잔디밭 위를 리듬감 있게 콕콕 거리는 참새가 신기해서 잠깐 시선을 뺏겼지만, 순식간에 나를 향해 날아오르는 참새떼를 피해야 했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귀찮은 구경꾼이었나 보다. 참새 무리는 벌써 다른 곳으로 가고 없었다.



얼마 전 겨울에 읽기 딱 좋은 책을 발견했다. 윈터링(Wintering 겨울나기)이 원제목인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이다. 국에 사는 케서린 메이의 책이다. 출판된 지는 한참 전인데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 겨울을 겪는다. 어떤 이들은 겨울을 겪고 또 겪기를 반복한다."


그녀가 말하는 겨울은 계절이란 사전적 의미도 있지만, 세상으로 단절된, 대열에서 벗어난, 실패한, 질병, 사별, 아이의 출생과 같은 사건들을 빗대어 표현했다. 휴식이 불가피한 상황, 겨울은 피할 수도 없지만 사람마다 덜 겪기도 많이 겪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자발적으로 조언을 건네는 많은 페이북 게시물들을 보았다. 그들은 난데없이 잘 버텨보세요.!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합니다. 이런 메시지는 마치 안부 카드처럼 적혀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염두에 둔 내용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메시지를 올린 사람이 누군가의 고통을 감지하고 두루뭉술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게 아니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허공으로 띄워졌다가 다시 발신자에게로 돌아가는 신호 같은 것 말이다.

도 안부카드 같은 게시물은 종종 본다.

타인의 조언을 무시하라. 당신은 반드시 성공한다.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는 법. 런 메시지가 필요한 겨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두가 힘든 시간이고 어려운 시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응원 메시지를 게시글에 올리는 건 자신에게 보내는 외침 같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나 역시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만족에 가까운 나의 글쓰기는 사실 내가 선택한 단어들과 내 취향에 맞는 풍경들이 묘사된다. 그녀처럼 많은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작가가 된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책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연의 세계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생존해 나간다. 자연은 분노하는 법이 없다. 자연은 순환적으로, 되풀이해서, 영원히 겨울나기를 한다. 식물과 동물들에게 겨울은 감당해야 할 임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책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 대목인 듯싶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들은 모두 비슷한 공포와 각기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바이러스를 겪고 있는 인간은 동병상련의 동지가 된지 오래다. 절망을 떨치며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면 다음 차례는 꽃이 만발한 봄이 올 거라고 믿는다.


풍요의 가을을 영원히 만끽할 수 없는 것임을.. 곧 냉혹한 겨울이 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자연 현상처럼 삶도 순환한다며 영원히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억울한 심정이고, 가진 것이 적어 보였지만, 계절과 인생의 겨울이 반복된다는 현실을 알아채고 살아내는 것이 겨울나기였다 보다. 그녀처럼 말이다.

오늘 산책길에 만난 눈은 금방 그쳐 버렸지만, 눈앞에 하얗게 날리던 풍경은 그 자체로 겨울의 아름다움이었다. 북유럽 핀란드의 겨울을 보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캐서린이 핀란드에서 보낸 겨울을 읽는 내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겨울처럼 느껴졌다.
내가 보내고 있는 이 겨울을 소소하고 단백하게 기록하고 싶어졌다.


딸기를 한입 먹고 나니 눈앞이 시원했다.

그러고 보니 잘 익은 딸기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운 겨울나기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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