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소시지와 가래떡이 필요한 시간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by 무쌍

소시지와 가래떡을 사 왔다. 소시지를 끓는 물에 데치고, 가래떡을 프라이팬에 구워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떡은 꼬치에 꽂아주기도 하지만 포크만 쥐어줘도 잘 먹는다. 간소하게라도 든든하게 한 끼식사를 먹이고 싶을 땐 좋은 메뉴가 된다. 아이들과 시간이 좋기도 하지만, 나만의 저녁시간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순간을 계속 미룰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이상하게도 프루스트의 책이 술술 진도가 나갔다. 작년엔 문장 하나하나 해석해 가며 읽다 보니 의미를 모르는 단어들의 주석을 함께 찾면서 금방 지쳐 지루해졌었다.

다시 펼쳐본 책은 화자의 기분이 철철 도배된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키스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도 이해가 된다. 할머니가 몇 마디 했는데 눈물부터 흘리는 남자아이를 보면서 다른 아이가 겹쳐졌다. 칠 전에 밥을 먹다 말고 눈이 뻘게지며 울던 아이를 달래줘야 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남자아이는 정확하게 상황을 기억하진 못해도 그날의 기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이 내뱉는 말이 아이에겐 가혹한 처벌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문장 속에 또 문장이 들어간 긴 문장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리듬 박자를 맞추게 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마치 춤을 추듯 반복되는 은유가 쏟아졌다.



소시지 하나와 떡 하나 소시지 하나 떡하나 꼬치를 꽂는 기분이다. 특히나 마지막 <되찾은 시간> 시리즈는 앞서 본 글보다 더 짝꿍이 잘 맞아떨어지는 듯싶었다. 코바늘 뜨기처럼 반복적인 패턴이 있는 것 같지만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 놓은 듯 정성스럽다. 색색의 실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프루스트는 쓸 내용을 미리 적어둔 노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사라진 알베르틴>을 거쳐서 <되찾은 시간>을 읽고 있는 중에 다시 1권이 궁금해졌다. 이유는 화자의 말투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시간을 찾아 들어갈 때와 글쓰기에 매달리는 화자가 된 후에 문장은 확실히 달라 보였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끝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작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프루스트가 쓴 다른 단편을 보면 <되찾은 시간> 속에 화자와 더 닮아 보였다.


어린 시절의 초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보다 실감 나게 전달하려고, 자신도 가물가물한 과거의 시간 속에서 풍경과 인물들을 어른거리듯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지 혼자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인지 지난날 내가 이 책의 끝 시리즈까지 펼쳐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리즈의 초반 부는 문장들이 나를 오락가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관련한 해석은 수많은 책들이 있고, 저명한 학자들의 분석들도 있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가 없다. 물론 작가 프루스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니 이 글을 보신다면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바란다.




민음사에서 완간된 13권 시리즈 중엔 중간은 건너 띄고, 뒷부분 <사라진 알베르틴>, <되찾은 시간>을 읽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화자의 독백 같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와서 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쓴 초고를 감히 다시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내 마음을 격하는 식으로 읽고 나니, 비록 자신이 이전에 쓴 글이 '한 번 읽은 것은 다시 읽을 수 있다.'라는 문구를 떠올릴 만한 부분은 전혀 없다 해도, 금방 그 글을 다시 잃기를 열망하게 되었다.


프루스트의 문장은 필사도 힘들다. 길게 이어지는 문장 스타일은 삽입구 삽입구 삽입구의 연결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문장들이 좋았다.


내가 글을 썼을 때, 그 문장은 나의 사유에 비해 지나치게 빈약했고, 조화롭고 투명한 시각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투명했으며, 나로서는 도저히 보완할 수 없는 결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을 읽는 일이 내게는 고통이었으며...(이하는 생략,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속내를 이렇게 다정하고 시시콜콜하게 알려주다니, 작품이라곤 없는 나지만 글쓰기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위트 넘치는 부분도 있다.


설마! 독자가 알아볼 수 있을까. 뭔가 부족하긴 해,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어쩌지, 독자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그래도 그런대로 독자들이 보통 접하는 것보다는 꽤 아름다운 것들이 있잖아.

그의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너스레에 나는 백번 동감했다. 그의 문장들 속엔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작품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세계대전 중에 병을 앓던 그가 파리로 돌아와 글을 쓰는 화자로 바뀐듯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늙어버린 모습을 목격한 듯 표현한다. 내가 가보지 않은 시간이었고, 예술가들이지만 그들을 만난 듯 선명한 문장들이다. 그리고 <되찾은 시간> 에서 화자는 결국 글을 쓰기로 한다.


엄마가 너무 신나 보였나? 아이들이 기웃거렸다.


"개학한다니까 엄마가 제일 좋지?"

"응"

"엄마는 우리 학교 가면 뭐 하려고?"

"엄마는 커피를 오래오래 한잔 마실 거야."


개학날은 점심만 먹으면 아이들이 온다. 방학이 끝나면 뭐가 좋은지 생각해 보니, 급식을 하고 오니 점심시간은 좀 홀가분할 듯싶긴 했지만 좋을 것도 없었다. 아이들이 있건 말건 나는 다른 일로 바쁘니 말이다. 개학한다고 엄마가 신난 게 아니란 걸 설명하려니 영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자기 미안해졌다.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조만간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소시지와 가래떡이 도와준 저녁 덕분에 엄마인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지만, 내일부터는 내게도 <되찾은 시간>이 온다. 아직 끝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읽을수록, 내 인생의 시작도 다시 더듬어보고 싶어 진다.


프루스트는 마지막 페이지를 미리 써두었다고 한다.

"만일 내게 작품을 완성할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과 힘이 있다면, 비록 그 일이 인간을 괴물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라도 인간을 묘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터였다."


옮겨온 문장이 마지막 문장은 아니다. 또 워낙 길어서 일부만 옮겨왔지만, 왠지 스포가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이미 과거에 있지만, 나는 그의 '시간'속을 계속 서성인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마다 책을 꺼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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