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나를 부른다

커피메이커와 밥솥

by 무쌍


오래 쓰던 친구가 말도 없이 훅 떠나버렸다.

안 그래도 지난달부터 말꼬리를 잘라먹듯 평소처럼 음성이 또박또박하지 않았다. 가끔씩 말이 짧아지고, 신음 소리처럼 '취...', '이...' 외 마디만 흘러나오더니 어느 날 꾹 입을 다물었다. 플러그를 다시 꽂아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뚜껑에 달린 모니터는 감감무소식이다. 전원이 들어오면 흘러나오던 목소리도 뚜껑을 열 때마다 잠금이 해제되어 나오는 '삐리릭'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 5년 전 수만 원을 주고 수리를 받았고, 그리고 몇 년 후엔 고무패킹 세트를 새로 바꿨다. 빼기는 쉬웠지만 꽂아 넣는 건 한참 걸렸던 게 생각났다. 그나저나 밥솥은 몇 년이나 쓴 걸까... 혼자 웃음이 난다.

수명이 다한 친구는 결혼하면서 처음 마련했던, 당시엔 고가였던 최신형 전기밥솥이다. 수리를 할 때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서비스센터를 검색하니 수리비용은 여전했다.
밥솥을 수리 센터가 아닌 가전 폐기물로 처리하려고 들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밥솥을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수리하러 가냐고 묻는다.


"아니요. 고장 나서 버리려고요."

"얼마나 썼어요?"

"십 년 하고 몇 년 지났나 봐요."
" 어머 오래 썼네. 집에 있는 밥솥이 자꾸 김이 새나는데 수리해야겠지요?"
예전 같으면" 저도 몇 년 전에 똑같은 증상이 있어서 수리했어요."라고 했을 텐데 내 입도 고장 난 밥통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들고 있는 밥솥이 무거웠고, 엘리베이터는 금방 1층에 도착했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자, 밥솥에게도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밥솥 자리는 아직 비어있다. 꼭 지금 나처럼 길을 잃은 듯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쇼핑몰을 둘러보며 할인쿠폰을 다운로드하여 두고도 맘에 든 밥솥을 찾지 못했다. 대신 밥솥을 두던 자리에 쓰지 않던 커피 메이커를 꺼냈다. 몇 주 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구연산으로 물때도 씻어내고 여러 번 물청소를 해두었다. 시험 삼아 물을 넣어 전원을 켜보니 작동이 잘 되는 듯싶었다. 말끔해진 진한 빨간색 커피메이커를 보니 따뜻한 커피생각이 더 간절했다.



원두를 담은 병뚜껑을 열었더니 커피원두향이 근사하게 맡아졌다. 커피는 마실 때도 좋지만 잘 로스팅된 원두향이 더 먹음직한 듯하다. 녹차를 마실 때나 홍차를 마실 때도 차를 내리기 전 찻잎향기를 맡는 건 즐거운 일이다. 냄새를 맡아 찻잎이나 원두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차 한잔 여유를 부리는 것은 냄새를 맡는 것이 모두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동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원두 갈리는 맛이 뻑뻑하지 않고 쓱 쉽게 돌아간다. 그라인더에서 나는 부드러운 소리가 등을 쓸어 주는 손처럼 나를 다독여준다. 고장 난 밥솥은 작별했지만, 또 다른 선택이 나를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머릿속엔 결정하지 못한 밥솥이 어른거리는데, 나는 왜 물건 사는 일이 피곤한지 모르겠다. 대신 커피 메이커에서 뜨거운 증기가 풍풍 거리며 뜨거워진 물이 조르륵 조르륵 내려온다. 고맙게도 커피를 뽑아내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커피 한잔을 다 마셔도 머릿속은 커피에 취해서 인지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렸다.
사실은 이렇다. 밥솥을 사려니 기능 좋은 것을 골라 사려는 생각보다 지출의 우선순위가 복잡해진 것이다. 식구는 늘었지만 살림은 자꾸만 줄이고 싶어 진다. 순리대로 카드 할부로 사야겠지만, 꼭 사고를 치고는 수습하는 기분이다.

지금은 밥솥이 없어서 커피메이커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문득 밥솥을 작은 걸로 사서 커피메이커와 같이 나란히 두면 좋을 것 같았다. 밥은 잔뜩 해두면 3-4일은 먹었지만, 그렇다고 부엌일이 줄어들진 않으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작동시킨 커피메이커가 내는 소리와 향기가 나를 정신 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기분은 커피를 안 마셔서였는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니 평온해졌다.


밥솥이 없어도 압력밥솥에 밥을 지으면 되는데, 저녁 메뉴가 당장 걱정이다. 마트로 향하는 내 눈에 방금 전 장바구니에 넣어둔 똑같은 밥솥상자가 보였다. 누군가 인터넷 주문을 한 모양이다. 1층 택배보관실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밥솥을 보니 나만 밥솥을 고장 낸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택배를 주문한 분이 부러웠다. 난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망설이는 건 밥솥구매 결정만은 아닌 듯싶다. 다만 노트를 정리하다가 지쳐버렸다.


딩동! 브런치에 걸어 놓은 알람은 정확하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알람을 설정해 두었다. 매번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오늘따라 날 부르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출간의 기회는 글에 집중할 때 찾아옵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우리 작가님 파이팅!"

브런치 팝업창에 쓰여 있는 말에 또 정신이 들었다.

내가 필요한 건 바로 나였나 보다. 어서 돌아오라며,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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