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도 비누꽃도 아닌, 풍선도 인형도 초콜릿도 없는 진짜! 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받고 싶어 했다.
평소 꽃가게에 장식된 절화들은 내 시선을 끌지 못했기 때문일까? 꽃을 매일 보러 가고 꽃사진만 찍던 나지만 막상 꽃집에 파는 꽃을 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의례 졸업식 당일이면 학교 앞에 꽃다발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으니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꽃다발 받고 싶다는 아이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검색 창에 '졸업식 꽃다발'을 입력하니 꽃다발 사진이 정말 많았다. 동네 꽃집들을 순회하며 꽃다발도 구경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평소 싫어하는 꽃이 없어서 인지, 모든 꽃다발이 다 똑같이 예뻐 보였다.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너 좋아하는 꽃 있어? 졸업식 꽃다발 사야잖아."
"지난번에 말해줬잖아."
"응, 생화 꽃다발 준비 할 거야. 색깔이라도 알려줘 봐."
"보라색! 난 보라색꽃이 좋아."
며칠 뒤 아이가 못 미더운 얼굴로 나를 부른다.
"엄마. 꽃다발 살 때 보라색 한 종류만 하지 말고, 파란색꽃도 넣고 그러데이션 알지?"
"아 그래?"
이미 내 핸드폰엔 한 두 종류 꽃만으로 만들어진 꽃다발 이미지를 저장해 두고, 꽃집에다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할 참이었다. 하마터면 내 꽃다발 주문은 아이를 실망시킬게 뻔했다. 그러데이션이라는 말을 쓰는 아이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혼자 꽃다발을 사러 가는 건 자신이 없어졌다.
졸업식 전날 남편과 집 근처 꽃시장을 찾았다. 북적이는 사람들은 반갑지 않았지만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꽃향기가 마스크도 소용없다는 듯 뚫고 들어왔다. 진한 장미향과 프리지어향이 섞인 듯한 향기가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선명해지고, 수분을 가득 담은 여러 가지 꽃이 섞인 향내가 머릿속까지 들어왔다. 땀이 송골송골하고 붉게 얼굴이 닳아 올라 있는 상인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천장까지 쌓여있는 꽃들을 보며 구경하느라 즐거웠다.
가게마다 보라색꽃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만들어진 꽃다발이 더 탐스러웠다. 가격을 물었더니 주인은 포장한 지 3일 된 거라며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아쉽지만 보라색꽃은 없고 장미꽃과 안개꽃이 섞인, 붉고 하얀 꽃다발이었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가게 주인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 꽃다발 사진 찍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라고 말이다. 남편과 난 착한 가격이 맘에 들었지만,다른 꽃다발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사진 찍는데 지장 없는 꽃다발'은 우리 부부가 가격을 문 지 1분도 안된 것 같은데 순식간에 다른 사람 손에 팔려갔다. 우리는 아이가 소원하는 보라색 꽃다발에 충실해야 했다.
졸업식날 아침까지도 꽃다발이 보이지 않자 학교에 가던 아이는 당부를 했다.
"엄마 이번엔 꽃다발 꼭 들어와!"
"응! 그럼 그럼. 걱정 마."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출발했는데, 졸업식 준비로 먼저 학교에 간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까지 왔냐고 묻는데, 우리가 늦을 까봐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사실 내가 문제였다. 오랜만에 하이힐을 꺼내 신었더니 걷는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간신히 시간을 맞춰 들어갔지만 이미 졸업식장은 꽉 차 있었다. 졸업생 옆엔 학부모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했는데, 한눈에도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아이와 그 옆에 빈자리가 쏙 들어왔다. 좀 더 서두를 걸 미안했지만, 꽃다발을 받아 든 아이의 얼굴은 환해졌다.
졸업식 꽃다발은 사진을 찍는 것 외에도기억해야할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부모의 취향이 아닌 받는 사람 바로 아이의 소원목록에 따라야 한다는 것! 희한하게도 아이의 졸업식 꽃다발은 제품 성능이 좋은 건지 ^^; 졸업식을 하고 나흘이 지났지만 여전히 향기롭다. 새하얀 안개꽃은 팝콘처럼 부풀었고, 보라색 프리지어는 줄지어 꽃봉오리가 열린다.
연분홍 라넌글라스는 두 송이었는데, 어느새 네 송이가 되었다. 보라색 장미와 파란 카네이션은 물을 갈아줄 때마다 화병의 물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며 가장 먼저 시들시들 생기가 사라지고 있다.
꽃다발엔 꽃 말고도 메시지 팻말이 꽂혀 있는데, 꽂아둔 졸업 축하 메시지를 잘 보이게 돌려놓으면 아이는 다시 안 보이게 뒤집는다. 아이가 부끄러워하는 행동 같지만, 이 릴레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 꽃다발이 다 시들어 없어질 때까지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아이의 학교생활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금방 시들 것 같던 꽃다발이 건재한 걸 보니 아이에게 고맙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꽃집에서 들은 '사진 찍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 말은 꽃다발을 팔려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나도 졸업식 꽃다발은 사진 찍는 것 외엔 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원했던 건 엄마의 관심이 듬뿍 담긴 꽃다발이었다.
아이의 졸업을 축하하러 갔지만, 정작 나도 꽃다발처럼 묶인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오직 하나, 내 아이를 위한 졸업식 꽃다발은사진 찍는 것 말고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