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숨을 쉬고 싶어 코를 풀고 약을 먹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십 년 넘게 살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이삿짐을 싸던 그 겨울 가장 심한 비염을 앓았다.
겨우 입으로 숨을 끌어당기며 내뱉는 숨에 꽉 막힌 현실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숨이 안 쉬어지면 뒷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곧 떠날 버릴 거라는 걸 아쉬워했지만 어디든 새로운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내가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함께 사는 가족뿐이었다.
이사를 나갈 날짜가 정해졌고,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녔다. 십 년 동안 계절 별로 꽃이 피던 자리를 모두 살펴볼 참이었다. 지난봄에 몇 번 찾아가지 않은 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겨울에 결정된 이사였으니 꽃들을 다시 만날 기회는 진작에 없었다. 꽃이 피는 봄이면 이곳에 나는 없을 테니 그 주변을 빙빙 돌고 도는 이별 의식은 나만의 애도였다.
분홍색 진달래가 가장 먼저 피는 봉수대 앞에 기대어 앉아서 내게도 숨통이 트일 시간이 와주길 기다렸다. 허덕이는 마음을 달래주길 꽃이 피는 계절에 기대 보려고도 했지만, 시간은 더디게 갔다. 즐거운 날은 금세 지나가버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니 하루가 너무도 느리게 갔다.
코가 막혀서 누워 잘 수 없을 만큼 답답한 날이 하루 이틀 계속 늘어갔다.
"진달래는 꽃이 피지 않으면 못 알아보겠어요."
"진달래가 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겠죠?"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히어리가 먼저 피어야 하니... 다음 달 까지는 장담 못하겠네요."
"히어리와 진달래는 비슷하게 피는 꽃나무 아닌가요?"
"작년 겨울 갈 길이 막막한 산길에서 히어리를 만나고 난 뒤부터 꽃을 발견하는 습관이 바뀌었어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걸 보기 시작했죠.
그 뒤론 연노랑 히어리가 피어야 산에 핀 진달래가 핀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봉수대에 앉아 고백을 하듯 달라진 마음을 털어놓았다. 코 앞에 피어나는 꽃들을 일일이 쫓아 보지 않고 시선이 던져진 곳에 멈춰 서서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결국 봉수대 주변에 피었던 진달래도 히어리도 보지 못했다.대신 이사 온 집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봄까치꽃을 발견하고는 진달래도 히어리도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새로운 곳에서 모든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낯선 집에서 신기하게도 숨이 쉬어졌고, 처음 느껴보는 아늑함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두려움을 없앴다.
제임스 웹 망원경이 찍어서 보낸 행성들의 사진을 보다가 "토성의 고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의 토성은 고리보다 상대적으로 어두웠다. 고리에 있는 메탄가스가 쏟아지는 햇빛을 거의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리엔 수많은 얼음 조각 암석들의 잔해들로 다양한 크기의 광물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데, 여러 겹의 고리가 반짝이며 너무 나도 우아하게 토성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흐트러짐도 없이 매끈하게 둥근 원 모양을 한 토성의 고리를 나도 갖고 싶었는지 모르겠다.그래서일까.
밖의 세상에서 들여오는 이야기에 빠르게 반응하고 움직였지만, 사실은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반짝이는 고리를 내세우고 살았다.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가림막처럼 세워두고 지내왔다는 것도 말이다.
토성은 발견 당시에도 똑같은 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태어난 대로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달라지려 하는 걸까.
인생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리의 중심이 된다는 걸 깨닫는 일이었다. 바깥에서 지켜보다 보다가 그만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숨을 잘 쉬게 되니 갑자기 사라져 버린 비염처럼 기적만 바라는 건가. 우주는 내게 이젠 숨 좀 돌리고 살라 했지만, 나는 여전히 숨을 잘 못 쉬던 날을 잊지 못하고 있나 보다. 익숙해질 때까지 멍한 시간만 낭비한 줄 알았는데, 내 삶은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그걸 알아채는 일도 나는 느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