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수선화는 탐스러웠다

수선화

by 무쌍

기억이 문이 열리고 가장 작은 꽃송이가 피어났다.

자연의 달력, 가장 먼저 수선화가 피었다. 얼핏 보면 쪽파처럼 초록색 줄기가 촘촘해 보였다. 줄기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달려있지만 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적당한 온도가 되지 않았을까? 겨울바람이 숭숭 불어오는 언덕엔 작은 꽃밭으로 언제 바뀔지 궁금했다.


마당 가장 높은 난간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낮은 담장너머 보이는 건 난감한 것들을 가려놓은 풍경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머리끝이 보이거나 안보이거나 둘 중에 하나였고, 발소리만 들렸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 걷고 싶었다. 낯선 골목을 산책하려니 시선은 바쁘지만 걸음 걸이는 아주 느림으로 바뀌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동백나무가 심어진 낮은 스레트 집이 모여 있었다.


붉은 동백꽃이 나는 아직 지겹지 않은데, 꽃송이가 말도 없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제주에 도착했을 땐 분명 꽃이 셀 수 없이 달려서 초록잎이 눈에 띄지 않았다.

며칠 만에 동백나무는 한겨울에도 초록 잎이 상록수인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차라리 꽃이 모두 시들고, 열매가 달려 씨앗이 떨어질 때 왔으면 좋았을 걸 아쉬웠다. 동백나무 아래 떨어지는 동백씨앗을 모아보고 싶었는데, 항상 타이밍이 문제다. 꽃이 좋아 찾아왔지만 시들고 마는 꽃이 미워졌다.


겨울 한철 꽃이 피는 따뜻한 남쪽으로 피신 오는 일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북한 담례를 준비해야 했다.

첫날부터 혼자가 되기 기다렸다. 가능하면 혼자서 나서고 싶었다. 동백나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수선화가 피었는지 확인할 길은 직접 가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스마트폰은 가지고 가야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은 수집하고 싶었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한눈에 보아도 제주수선화 꽃밭이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몇 걸음도 안 되는 꽃밭을 보러 가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꽃밭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는데, 가만히 보니 시든 꽃이 절반이었다.

제주수선화는 12월부터 피기 시작했다는 걸 잊고 있었다니, 꽃은 봄이 될 때까지 이렇게 곱게 피어있을 것이다.




바닷가가 가까운 집 마당이 있는 빨간 지붕이 올려진 제주식 구옥에 사는 그녀는 여전히 화장이 짙은 얼굴이었다.

마당엔 동백꽃이 돌멩이처럼 뒹굴고, 노란 나팔이 달린 제주수선화와 꽃잎까지 노란 수선화가 꽃다발처럼 피었다.


꽃을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나에게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눈이 하얗게 쌓이는 날엔 수선화가 곱긴 하더라. 그런데 난 너처럼 아파트에 살고 싶어. 마당 없고 흙도 없는 아파트 말이야."

그곳을 못 떠나는 그녀의 마당엔 수선화가 매년 피어날 것이다. 그녀가 시집 온 해 부터 한 해도 거른적이 없다고 했다.


냉정한 구석이 없는 제주의 겨울은 감촉이 좋은 목도리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것을, 다시 돌아온 서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고 건조한 겨울이다.


풋풋했던 꽃은 시들어도 뿌리는 남아 할 일을 하겠지. 늙으신 어머니가 버티는 동안은 말이다.

그리고 지금, 제주 어디든 수선화 꽃송이가 탐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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