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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소 May 19. 2021

나의 기억과 엄마의 기억

난 그런 적 없어

평소에도 무심하지만 어버이날이라고 새삼 연락하지도 않는 딸이다. 

그런 딸을 늘 걱정해주는 존재는 부모님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해주는 이는 엄마다. 


엄마, 아빠와 나의 대화는 짧게 마무리된다. 별일 없지. 그렇죠 뭐. 질문도 짧고, 대답도 짧아 대화라 할 수 없는 말들만 오고 간다. 다른 날과 다르게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너 공주였잖아. 내가 옷 다 다려주고. 그때는 다리미도 없어서. 어휴." "내가 그랬다고?" 속으로 '그렇게 한건 엄마의 욕심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왜 그랬냐고 묻지를 못했다. 


"남동생은 학교 간다고 나가는데, 너는 '뽀뽀뽀' 다 보고 천천히 나간 거 기억 안 나? 혼자 얼마나 느긋했는지. 속 터져서. 학교 일찍 가서 뭐하냐면서 시간 딱 맞춰서 나가고" 엄마가 나를 모함하는 거 아닐까. 초등학교 6년, 중고등 6년 개근상을 받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20년 회사 다닐 때도 지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30분쯤 일찍 도착해서 청소했었다. '성실'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뽀뽀뽀'를 보기 위해 4살 차이 나는 남동생보다 학교를 늦게 갔다는 건 더 믿을 수 없다. 


"학교 가면 선생님이 이뻐해서 네가 선생님 무릎에 앉아있고 그랬어." "에이, 설마. 지금의 내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선생님 무릎에? 무릎에 앉을 만큼 좋은 기억의 선생님이 없는데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나? 선생님들이 엄청 이뻐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학창 시절이 있었던 말이야? 의외네." 

"넌 뭘 해도 금방 배우고 잘했어." 몰랐다. 지금은 아니다. 뭘 배워도 느리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천재인 줄 알고 기대하면서 키웠다가 점점 실망한 거 아닐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을 텐데, 서서히 실망하면서 살았을 엄마가 조금 존경스럽다. 자식에 대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혼자 잘 큰 줄 알면서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재밌다. 나의 기억과 엄마의 기억이 달라서. 어렸을 적 기억이 왜곡된 채 그것을 오해하고 산다. 혼자 차곡차곡 모아놓고 상처 받고, 그것을 엄한 곳에서 위로받으려 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는 나의 과거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엄마의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든 기억에 계속 힘을 실어주고 싶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런 것이 스스로 만든 굴레가 아닐까.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도 발목 잡히고 살아가고. 또 한 번 꺼내서 고뇌하고.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새로웠던 나의 어린 시절. 게으른 공주에 약간의 관종도 있는 듯하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는 싶지만, 그 과정이 무척이나 게으르다. 뭔가 딱히 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과정을 '고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공주는 싫다. 조금 더 진화하고 싶다. 고뇌하는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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