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마음에는 여유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다. 점점 빨라지던 마음이 곧 바빠졌고, 급해졌다. 쫓기는 듯했고 뒤를 돌아보게 됐다.
'잘한 게 맞나? 그때 그러지 말걸 그랬나'
이렇게 후회까지 더해진 마음은 어둑어둑해졌다. 마음이 어두워지니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들지 않으니 어두운 것이 당연했다. 나의 해를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내 어두움은 짙어졌다.
한 달이었을까. 아니 일 년이었던 것 같다. 더 오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어두운 마음은 자꾸 티를 냈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비집고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격지심이기도 했고 괜한 눈물이기도 했으며, 드물게는 자책이기도 했다. 매번 모습을 바꿔 나타나는 마음이 미웠다. 이렇게 어두운 마음이 나타날 때면,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과 나를 비교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 자신이 행복한 시간에도 더 행복한 사람을 찾아 비교했다. 꾸역꾸역 나를 바보같이 만들며, 내 마음은 그렇게 눈물이 되고 자책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를 안아주기보다는 외면하는 게 훨씬 쉬웠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자만이고 경솔이며, 더 채찍질해야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이건 틀린 방법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소용없었다. 막상 자격지심에 둘러싸이고 나면 내 손에 쥐어진 건 채찍뿐이었다. 그 어느 자리에도 나를 안아줄 생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유를 찾고 싶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은 모두 내가 만든 거니까. 여유를 찾으면 보다 나아질 것 같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생각을 비우고 싶었고, 내가 나를 미워할 시간을 빼앗고 싶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 해를 들이려고 한다. 쉬지 않고 행복한 것만 보고 생각해야지. 그래서 어두움은 끼어들 틈도 없게 해야지. 나와 나 사이에 행복이 넘쳐 어두움은 돌아가도록.
여유를 찾겠다고 제주도 행을 결심했다. 얼마나 머물다 와야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시간이 중요한 여행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목표가 필요했다. 얼마 안에 무조건 행복해진다! 내가 생각한 기간 동안에는 무조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약속했다. 아, 몇 가지 약속을 더 했다. 나와의 약속을 못 지키는 걸로 속상해하지 않기, 내 탓하지 않기,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기.
제주도에 온 둘째 날. 길을 걷다 시든 수국을 발견했다. 한 뭉텅이의 수국과 풀이 모두 시들어있었다. 얼핏 불에 타 보일 정도로 말라있었는데, 그 아래쪽에 딱 하나 예쁘게 피어있는 수국이 빼꼼 나와있었다. 하나하나 시들어감에도 아랑곳 않고 남아있는 그 수국에게 고마웠다.
수국 친구들 사이에서는 뒤늦게 시드는 이 수국이 느림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림보 수국 덕분에 내가 길을 걷다가도 행복할 수 있었다. 필 때도 다른 수국보다 느리게 피었을까? 다른 수국들이 하나, 둘 씩 열리는 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결국 피는구나. 느리지만 참 예뻤다. 이제는 다른 수국들이 끝까지 피어있는 너를 부러워할 것이라 생각했다.
수국 하나가 오늘의 나에게 해가 되어주었다. 우연히 만나 더 가치 있었고 쉽게 보이는 높이가 아니라 더 소중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못 보았을 수국을 보았다는 것도 기뻤다. 별걸로 다 기뻐서 행복했다. 매일이 오늘 같기보다는 오늘처럼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줄 아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또 한 번 내 마음에 어둠이 다가왔을 때, 오늘처럼 내 마음에 해를 띄우기를.
자격지심에 휩싸여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는 내가 아니라, 오늘부터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내가 되기를. 내 마음에도 여유는 있었다. 어두우면 보이지 않는 여유를 위해, 앞으로 꾸준히 해를 비춰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