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너무나도 행복해
제주도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세화에서 김녕으로, 김녕을 거쳐 지금은 한라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밥을 먹는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고, 가보고 싶던 곳에 가도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을 보며 매일같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벌써 이곳에서의 일주일이 지났다는 생각에 괜스레 우울해진다. 이제 겨우 8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심지어 그 안에 오늘은 절반도 채 남지 않았구나. 으 아쉬워. 조금 더 제주도를 온몸으로 느끼고 담을걸. 나름 잘 쉬고 잘 먹고 잘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넘실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제주도는 나를 기대하게 하고, 실망하게 했다. 그러곤 실망이 채 1분도 가지 않은 순간 다시 행복을 쥐어 준다. 자, 가져! 오늘치의 행복이야. 매일매일 주어지는 행복은 딱 적당한 만큼이었다. 고요하지 않고, 조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 가득 찬 평온함이 그 행복을 채웠다. 노을을 위해 한 시간 반을 달려간 애월에서, 보이는 건 크고 어두운 구름의 밑바닥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어두웠지만 그래서 선선했고, 그래서 시원했다. 손가락 사이사이, 옷 위로 느껴지는 긴 바람들 덕분에 혼자 걷는 시간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러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와 땅이 밝아질 때면, 또 어느새 이마가 뜨거워져 오곤 했다. 그렇게 더워할 즈음, 해는 다시 구름 뒤로 숨어 바람이 더움을 식혀주고, 그렇게 제주도는 매 순간 나의 예상을 빗나가며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바다의 노을은 그날 끝내 볼 수 없었다. 수평선 저 끝에서부터 머리 위 하늘까지 꽉 찬, 붉은색이 묻은 구름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발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무섭게 내릴 것 같은 비구름 아래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서서히 붉은 구름을 내게 보여주었다. 오기로라도 계속 바다에 있었다면, 지금의 이 노을도 보지 못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조금 먼저 택시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갔다. 잠깐의 시간이기에 눈에 담고, 카메라로 담기에 바빴다. 꼭 보고 싶던 날, 못 볼 것이라며 포기하고 뒤돌아온 나에게, 실망이 점점 커지던 그 순간. 제주도는 그렇게 내 감정을 순식간에 뒤집어놓았다. 기대를 실망으로, 곧이어 행복으로. 그렇게 날 손바닥 위에 두고 다루는 제주도가 너무 좋았다. 나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기분을 가져다주는 제주도가 너무 좋았다.
2박 3일, 3박 4일. 매번 순식간에 지나가던 여행이 아닌 보름이라는 넉넉한 기간이 주는 여유로움도 이번 제주도를 좋은 모습으로만 기억하는 것에 한 몫했다. 속상할 때쯤, 아쉬울 때쯤 돌아오는 내일이 있으니까. 이곳이 오죽 행복하면, 비가 오는 하늘도, 그로 인해 방충망에 묻은 빗방울들도 예쁘게만 보인다. 천둥 번개로 정전이 되기도 하고, 구석진 숙소에서는 전화가 안 터지기도 했지만, 그저 예뻤다.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리든, 예쁜 하늘과 바다, 산과 땅이 보였다. 도무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 속에 놓인 내가 너무 부럽다.
기대가, 실망이, 속상함이, 행복함이 섞인 제주도의 매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자니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 든다. 어떤 느낌이라고 정의하기엔, 이곳에서의 나의 시간이 너무나도 복잡하지만 단순하고,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리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매일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무얼 보러 가볼까. 몇 시에 나갈까. 어떻게 갈까. 수많은 고민 끝에 문 앞을 나선다. 막상 짠 계획은 걷다가 힘들면 바뀌고, 배가 고프면 바뀌고, 배가 불러도 바뀐다. 그럼에도 그날의 계획을 짜는 시간이 너무 알차고 신이 난다.
이번 제주도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오자! 스트레스를 버리고 오자! 생각을 정리하고 오자! 별별 생각을 다하며 여러 목표를 만들었지만, 사실 그저 제주도가 오고 싶었기도 하다.
제주도에 와서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 단톡방에 제주도 사진을 올린다. 바쁜 부모님도 이 바다를, 맛있는 밥을, 예쁜 하늘을 같이 보면 좋으련만. 행복한 와중에 살짝 고개를 내미는 죄책감도 아예 없지는 않더라. 혼자 처음으로 긴 시간 여행을 떠났고, 부모님이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특히 무얼 먹는지 많이 공유하고 있다. 엄마, 아빠는 쟤가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잘 챙겨 먹고 다니나 신기해하고, 나 역시도 내가 왜 이렇게 뭐든 잘 먹고 열심히 먹는지 그저 웃길 뿐이다. 나를 아직 시계도 못 보고 새벽에 집 밖에 나가 놀았던 어린아이로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지금쯤 천둥, 번개 속에서 혼자 누워 자는 딸내미를 너무나도 대견해하고 있겠지. 정전도 안 무서웠어? 엄마, 아빠의 물음에 안 무서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불 꺼진 김에 그냥 일찍 자는 거지. 진짜 나는 9시 반에 잠들었고 엄마, 아빠는 내가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나 놀라버렸다. 나는 세상에서 벌레와 그 외 비슷한 것들이 제일 무서운데, 제주도에서도 그것들을 빼면 제법 무서운 것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길을 걷다 벌레 소리에 흠칫해 멈추기도 하고, 발밑 벌레를 밟을까 쳐다보느라 느리게 걸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그냥 잘 지낸다.
제주도에서의 나의 15일은 행복으로 꽉 찼으면 한다. 지금처럼만, 지금 까지처럼만 비슷했으면. 언제든 제주도를 떠올리면 이번 여행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그럼 그 순간의 나도 여과 없이 행복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