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을 위하여 상을 엎을지니
"화(和) 있을진저, 外食(외식)하는 자여."
(겨자풀 글밥상 5월 13일, 개역개정)
"장인이 만든 정갈한 음식을 가져와 밥상을 차리는 자에게, 샬롬이 임할 것이다."
(겨자풀 글밥상 5월 13일, 새 번역)
"화(和) 있을진저, 外食(외식)하는 자여"
예수께서는 "화(火) 있을진저, 외식(外飾)하는 자여"를 외치며 진정성 없는 허울 좋은 종교성을 꾸짖으셨다. 오늘 나는, "화(和) 있을진저, 외식(外食)하는 자여"라고 외치며, 성서 해석 장인들이 빚어낸 좋은 글들로 차린 외식(外食) 밥상을 가져와 '샬롬'을 전하려 한다.
<노래하며 우는 마음>이라는 학대경험자의 눈으로 읽는 시편 묵상을 내 안에서 길어내고 글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 지난한 여정을 홀로 외로이 걸어오는 동안, 나에게 산소호흡기가 되어준 글들이 참 많다.
나에게 있어 성서 해석의 가장 큰 장애물은 교회에서 그리고 자라온 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체화한 '여성혐오적' 가치관이었다. 여성을 딱히 증오하거나 모두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의미에서 '여성혐오'가 아니다. 여성의 가치는 남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가치관, 여성의 역할은 남성을 돕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가르침, 그리고 여성의 인내와 헌신에는 한계가 없어야 하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닮은 길이라는 가학적 신학.
그 모든 것들은 여성혐오라는 독극물이 되어 '선의'를 가지고 살아가려는 수많은 여성들의 생기를 꾸준히 갉아먹고 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했고, 우리의 귀와 입을 막았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 틀 안에서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 어둠에서 한 줄기 빛처럼 건져준 문장들을 오늘 함께 펼쳐 보려 한다.
산소호흡기 도서관을 만들어도 될 만큼 많은 책들이 나를 살렸다. 하지만 Jared Byas의 <Love Matters More>는 더 특별했다.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온몸에 퍼진 염증으로 고열이 날 때마다, 늘 항생제처럼 꺼내 복용하던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직접 낭독해 주는 오디오북을 듣고 있노라면, 천상의 목소리가 따로 없다. '진리'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무게중심 삼아, 잘못된 성서 해석을 이해하기 쉽게 바로 잡고 소화하기 쉽게 요리해 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특히 '잘못된 여성혐오'로 인한 심한 발열 통증을 치료해 준 구절은 다음과 같다.
"Many Christians, especially women, have been taught what might be called "doormat love" — that not being heard and getting stepped on again and again is a virtue. As if that's what being like Jesus is all about. This is simply a lie." - Jared Byas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여성들은 '을(乙)로 살아가는 사랑', 자기 의견이 반복적으로 무시당하고 자기 존재는 계속 짓밟히는 관계를 미덕으로 배우며 자라왔습니다. 마치 그게 예수님을 닮는 길이라도 되는 양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 제러드 바이어스
알고 보면, 예수님을 닮는 일은 무조건 침묵하고 무시당하며 버텨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 안에서도 경계를 세우셨고,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을 늘 꼬집어 드러내며 지적하셨다. 그들이 예수를 돌로 쳐 죽이기 원할만큼.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는 '을'의 자리에 있는 자들과 여성들에게 '묵묵히 짓밟힐 것'을 요구한다. 그것도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그릇된 해석 아니냐는 의문을 품거나 '감히' 이를 표현하면 온갖 비난의 말이라는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늘 '잠잠히' 짓밟혀 '덕을 세우는' 일에 익숙했던 나를 살려준 구절이다. 생명수인 줄 알고 벌컥벌컥 마셨던 독극물이 쌓인 내 몸과 마음을 해독해 준 말이었다.
물론, 이런 '영적 학대'의 대상은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 자리에서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꿈틀 조차 못 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도발적인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지고 가는 십자가'는 집어치우고, 이제 함께 그리스도를 따라 상을 엎자고. 우리는 착취자와 학대자들의 구세주가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밟히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결코 주님 뜻이 아니라고.
이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김세윤 박사의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이다. 매우 얇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특히, '남성에 대한 여성의 순종(복종)'을 강요하는 오류를 콕 집어 이야기하는 부분을 좋아한다.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며 자기 명령 아래 인사 불란 하게 움직이는 가정을 화평한 가정이라 여기고, 순종 잘하는 아내로부터 대접받고 사는 남편은 스스로 행복하다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견입니다. 그런 남편은 자기 아내와 그런 관계를 이룸으로써 사실상 아내를 사랑(자기를 내어 줌)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격체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와 부림과 섬김의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부 관계가 과연 행복한 관계일까요?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올바른 인격체들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런 가정이 과연 화평한 가정일까요?" - 김세윤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내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치워 주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올바른 인격체들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런 가정이 과연 화평한 가정일까요?"라는 질문은, '아이들 생각해서 참아'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참아'라며 앵무새처럼 말하던 어르신들의 폭력적인 조언의 굴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착취는 착취고, 폭력은 폭력이다.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평화를 깨는 일'이 아니라 '진리, ' 곧 '가식 없는 진실함'이다. 누군가의 착취를 사랑으로 포장해 주고, 누군가의 폭력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눈감아 주기를 반복하는 것은 썩은 시체가 가득한 무덤을 회칠하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성서 해석 장인'들의 언어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해석의 언어에 갇힌 나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자유한 모습, '가식 없는 진솔한 나 그대로' 살아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명목으로, 누군가 나를 착취하도록 내어주기를 반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샬롬'을 위해 멈춰야 한다. 진정한 '샬롬' 안에는 착취가 설 자리가 없다. 참된 '샬롬'은 모두를 자유케 해야 하니까.
"화(和) 있을진저, 外食(외식)하는 자여"라는 제목으로 차려낸 '外食(외식)'밥상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진정한 화(和), 샬롬을 가져다 주기를. "화(火) 있을진저, 외식(外飾)하는 자여"라는 꾸짖음을 들어야 할 자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내어주지 않을 자유를 선사하기를.
#겨자풀식탁이야기
#노래하며 우는 마음
#학대 경험자의 눈으로 읽는 시편 묵상
[*덧글: 지난 주말, 브런치 창을 열고 검색어를 입력했습니다. '브런치북 연재 휴재.' 브런치북을 처음 시작하면서 휴재나 지각만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말이죠. 읽어주는 이 많이 없어도, 스스로와 지키고 싶은 약속이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나의 글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독자를 향해 마땅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휴재'라는 단어로 검색하고 있다니 내가 나를 먼저 실망 시킨 순간이었습니다. 일상이 너무 바쁘고 빼곡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정성 들여 글을 쓰려고 따로 빼어둔 시간까지 반납해야 했다는 핑계를 대봅니다. 고민 끝에 '작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이번주 브런치북 연재는 휴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려 했으나, 그건 도저히 허락할 수 없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오늘 들고 온 겨자풀 식탁 글밥상은 "화(和) 있을진저, 外食(외식)하는 자여"가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