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며 우는 마음의 끝, 함께 걷는 마음
목소리도, 체온도, 어떤 형체도 없는 '혼돈과 흑암‘의 한가운데 홀로 있었다.
수면 위에 운행하는 영을 갈망하며, 나의 눈물을 타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빛이 있으라" 그 한 마디를 바랐다.
<노래하며 우는 마음>에서 이전에 묵상했던 시편을 꺼내어 읽으며
홀로 고독하게 걸어온 길을 다시금 걸었다.
그때는 분명 황량한 사막이었는데 지금은 꽃이 피어 있었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올리는 노력 없이도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목을 축일 수 있었다.
'혼돈과 흑암'밖에 없던 곳에, 따스하고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나누는 질서가 생겼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와, 출렁이는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았다.
총총거리며 뛰어가는 사슴과 우렁차게 울부짖는 사자를 보았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형상들을 만났다.
'노래하며 우는 마음'은 '노래하며 춤추는 만남'이 되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생육하며 번성하였다.
마음이 마음을 채우고, 함께 손을 잡으며 여호와의 동산을 거닐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한 마디가, 매주 마음을 울렸다.
짧지 않은 연재를 마치며,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야를 떠올려 본다.
'시궁창'을 뜻하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운 엘리야는
자신의 삶이 시궁창이라고 확신하며 죽기를 간구했을 것이다.
그런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공급하신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뛰어난 영성'이 아니었다.
'대적을 물리칠 강력한 군대'도 아니었다.
"나의 종인 네가 이렇게 낙심하고 누워 있다니, 믿음이 적은 자여!"
라고 꾸짖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으셨다.
'시궁창'에 누워 '죽음'을 간구하던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것은 일상에서 늘 먹는 '떡'과 '물'이었다.
그리고, 고요 속에 등을 토닥이듯 다시 잠들게 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 19:7)
여호와는 시궁창 나무 아래 드러누운 이를 흔들어 일으키며
"떡과 물 없이도 나를 힘입어 네 길을 이기라"명하시는 분이 아니다.
'더 자라, 더 쉬어라' 어루만지시며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염려하신다.
떡과 물 없이는 '여호와의 뜻'도 아무 의미 없는 인생임을 아신다.
자고 또 자는 쉼 없이는 생을 완주할 수 없는 호흡임을 아신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바람 후에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시며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신 여호와.
모든 흔들림과 무너짐, 그리고 불이 지나가고 난 후
마침내 "세미한 소리"로 임하시는 여호와.
<노래하며 우는 마음>은 그분을 다시금 만난 여정이었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권능의 여호와께서
혼돈과 흑암의 시궁창에 누워 있는 이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시는 순간들이었다.
눈물의 수면 위를 맴도시던 그 영은, 빛을 비추셨고 떡과 물로 나를 일으키셨다
그분의 어루만짐 아래 푹 자고 일어나, 나를 찾아오신 음성을 듣는 날들이었다.
이제, 일어나 이기며 가야 할 내 길을 향해 다시 걷는다.
먹고 일어나 걸어라.
쉬고 일어나 걸어라.
시궁창으로 찾아오신 여호와께서 함께 걸으시리니, 앞서 행하시리니.
* 15주간의 연재를 마치며 에필로그를 씁니다. 홀로 마음에 품고 있던 노래들을 하나씩 내어 놓으며, 함께 노래하는 공간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홀로'에서 '함께'로 나아가는 여정에 동행해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노래하며 우는 마음> 연재를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겨자풀식탁이야기
#노래하며 우는 마음
#학대 경험자의 눈으로 읽는 시편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