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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이 왜 '겨자풀' 식탁인가요? (1)

‘나무’ 아닌 ‘풀’이어도 좋습니다

by 겨자풀 식탁


겨자풀 식탁 주인장 겨자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무물' 코너입니다. 구독자 8명으로 시작하는 무물 매거진이기에 질문은 제 마음대로 선정해서 자문자답 하려고요. 글로 써서 나누며 소통을 추구하는 태생 관종 브런치 작가가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겨자풀'은 성서(Bible)에서 가져온 이름이에요.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복음 13:31-32 표준새번역)


'겨자씨 비유'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 중에서도 꽤 유명한 비유이죠.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 뿐 아니라, 성서를 개인의 종교 경전으로 읽지 않는 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고 '작은' 겨자씨가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큼 '커다란' 나무가 되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겨자씨 비유'라고 알려진 이 비유는 폭풍 성장 혹은 풍요로운 발전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호경 교수님은 <예수가 하려던 말들: 예수의 비유에 관한 성서학적•철학적 사색>에서 이 비유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겨자씨 이미지 (출처:Depositphotos)

"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가 분명하다. 그러나 겨자씨가 얼마나 큰 나무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과장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일반적으로 겨자풀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완전히 자란 겨자씨가 생각처럼 크고 훌륭한 나무의 모습을 갖추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유채꽃과 유사한 정도의 모양을 갖춘다고 한다. 겨자씨는 자라서 울창한 소나무나 잣나무와 같은 형태를 갖지 않는다."


겨자풀이 자라는 동안 노란 꽃을 피운 모습 (이미지 출처:Depositphotos)

"예수는 레바논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 예수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겨자풀에 깃들인 새와 같다는 사실에 공감했을 것이다. 레바논 백향목처럼 멋지고 화려한 삶은 아닐지라도,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쉬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겨자풀과 같은 일상, 그래서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어쩌면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 고통스럽고 갑갑하고 언제든지 떠나 버리고 싶은 허다한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귀한 생명을 경험했고 안식을 누렸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쳤다."



책에 담긴 이 내용을 읽고 겨자풀이 담고 있는 뜻에 너무나도 감동을 받은 저는, 나중에 글을 쓰게 되면 꼭 '겨자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싶다 생각했어요. 다 자라도 기껏해야 유채꽃 정도의 크기와 모양을 지닌 겨자풀, '나무'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그 겨자풀 이야기가 바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고 아담하고 어쩌면 볼품없어 보이는 '겨자풀'이라 해도 그 안에는 분명 겨자풀만의 '생명'이 심겨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생명은 "겨자풀과 같은 일상, 그래서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어쩌면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 고통스럽고 갑갑하고 언제든지 떠나 버리고 싶은 허다한 시간들 속에서" 여전히 자라고 성장해서 누군가 와서 깃드는 품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학대 경험에 대한 글을 쓰는 저의 자라감이 만드는 겨자풀 그늘 안에서, 누구라도 잠시 쉼을 얻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작가명은 '겨자풀' 식탁입니다.


제 답변이 궁금증을 풀어드렸기를 바라며, '겨자풀 식탁' 올림.




#누구도 학대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겨자풀식탁이야기

#겨자풀AMA자작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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