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질함을 뚫고 나온 반짝이는 너를
오랜만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무조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선크림을 바른 후 눈썹을 그린다. 그날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귀걸이와 반지를 꺼내 (어떤 날은 목걸이까지 추가) 착용한다. 이런 '셀프 단장 의식'을 원칙으로 지켜온 지 어언 1년이다.
한창(?) 우울하던 시절, 아침이면 배는 더 우울해졌다. 밤에는 밤이라는 이유로 누구나 조금은 센치해지는 사치를 누릴 수 있기에, 내 우울감도 거기 묻어 슬쩍 낭만 대열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눈도 뜨기 싫고 일어날 기운도 없는 나에게 성실하게 제멋대로 찾아온 하루에 화가 났다. '맘대로 우울하게 냅두지도 않네, '하루' 너 이 자식은.' 싶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시절을 꽤 오래 보낸 후 스스로 만든 의식이었다. '잠'에서 '삶'으로 넘어왔다는, 일종의 '오픈 간판 내걸기' 의식이다. 어김없이 떠오른 해에 질질 끌려가며 하루를 '버텨내는' 대신, 변함없이 찾아온 해를 반기며 하루를 '살아내자'라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의식이 깨졌다. 내가 씻어야 할 시간에 막내가 유독 칭얼대며 자다 깨기를 반복,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막내를 겨우 다시 재우고 나니, 큰 아이들 아침을 차려줘야 할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차리면서 내 커피를 내린 후 아이들 물병 및 자잘한 소지품을 챙기고 시계를 보니, 이미 나가야 할 시간 5분 전이다.
에라 모르겠다. 옷을 고를 시간도 없어 옷장 문 가장 앞에 걸려있던 맨투맨 티를 낚아챘다. 머리만 쑥 들이 밀고 양팔을 하나씩 넣어 가며 계단을 질주했다. 멋대로 눌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덮어줄 모자를 썼다. 귀걸이도 까먹었다. 잘 때도 끼고 자는 '이 또한 지나 가리라' 엄지 반지가 오늘 장신구의 전부다.
그렇게 아이들을 차에 몰아 싣고 나가 다소 정신없는 아침을 보낸 후 집에 오니 오전 11시 반. 뭐라도 차려 먹으려고 손을 씻다가 올려다본 화장실 거울 속 내가 나를 바라본다.
'너 오늘 좀 예쁘다?'
헐?! 미친 소리를 한다, 얘가.
코디의 일부가 아니라 씻지 못해서 할 수 없이 푹 눌러쓴 모자와 함께 시작한 날에는 종일 내가 못나 보였더랬다. 간밤에 끌어안고 잠든 우울감이 모자에 짓눌려 꼬질한 냄새를 풍기는 듯했던 것 같다. 그런 날은 대개 저녁까지 짬이 나지 않아 밤 샤워를 한 후에야 꼬질한 기분이 씻겨 내려가곤 했다.
그런데 그 '꼬질한 하루'의 상징인 모자 눌러쓴 내가 예쁘다고? 뭐지? 싶었다. 자의식 폭발? 공주병? 아니다. 거울 속 내가 들려주는 미친 소리를 정의하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너무 귀여운 병명들이다. 문득, 비포와 애프터 차이가 극명한 길냥이 사진이 생각났다. 유기견, 유기묘의 전후 모습을 비교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목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나를 잠식하던 우울감에 스스로를 '유기'했던 나. 그 '유기나'를 씻기고 닦아 빗질을 해준 지 1년이다. 그 '유기나'에게 예뻐지라며 온갖 소소한 장신구로 꾸며준 지 1년이다. 어울리든 말든, 네 기분만 좋으면 된다며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에 연지를 찍어 발라준 지 1년이다. 날마다 색다른 기분으로 시작 하라며, 매일 다른 옷을 입혀준 지 1년이다.
그런 '유기나'가 오늘 하루, 모자를 푹 눌러쓴 거였다. 1년 만에 어쩌다 오늘 하루, '꼬질 모드 코디'를 한 거였다. 1년 전 '꼬질 모드 코디'와 본질이 달랐다. 우울감에 일어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루동안 소화하고 싶은 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의욕 폭발 일상 때문이었다. 그러니 예뻐 보일 밖에. 그러니 사랑스러울 밖에.
1년 동안 쌓인 애정이, 1년 동안 쌓인 돌봄이, 오늘 하루의 꼬질함 따위를 이길 수 없었던 거다. 아니, 오히려 그 꼬질한 코디 속에서 더 눈에 띄게 그 차이가 드러났던 거다. '너, 이제, 꼬질하게 모자 눌러써도 예뻐'라고. 내 속에서 내가 그렇다고 한다. 내가 나의 이 꼬락서니가 예쁘다고 한다. 1년 동안 돌봐줘서 고맙다고 한다. 1년 동안 애써줘서 고맙다고 한다.
왓씨. 이게 뭐라고 쓰면서 눈물이 난다.
[2024년 10월 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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