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뜨겁게 다정하기로 하였노라
"다정도 병"인 인간이다 나는.
부모님도 늘상 걱정이셨던 나의 '다정 유전자.' 우리 식구들 누구도 태생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도 친척 어르신들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유독 다정 유전자를 몰빵하고 태어난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늘 모자란 헐랭이벌렝이 오지라퍼요 사람 잘 믿는 빙충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은근 좋았다. 사람이 좋았고, 사람을 믿는 것이 좋았고,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고, 사람에게 퍼주는 것이 좋았고,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좋았다. 나를 등쳐먹는 부류들을 걸러 낼 줄 몰라 겉옷에 속옷까지 뺏기고, 흠씬 두들겨 맞아 피를 흘려도 배시시 다시 일어나 웃는 미련퉁이 재질이었다.
마흔에 시작한 각성. 내가 가장 먼저 내다 버린 건, 아니, 전원을 꺼버린 건 나의 '다정력'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 전원 코드를 뽑아 버려야 회생이 가능한 상태였을 뿐이다. 뽑아 버리고 나니 그 삶도 꽤 괜찮았다. 몸체보다 큰 대형 군용 바퀴를 끼워 튜닝한 자동차처럼, 경차에 달린 거대 바퀴로 여기저기 험한 계곡과 자갈밭을 넘어 달렸다.
달리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해가 지는 풍경이 보이는 바다 앞에 서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 숨통을 넓혀 주었고, 탁 트인 시야가 내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손에 닿는 파도의 간지러운 감촉, 발바닥에 닿는 모래사장의 까끌한 생명력.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싱그럽고 벅찼다.
그러고 나니 어느 틈에 '다정 유전자'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의 기사회생을 위해 뽑아 버린 후, 어쩌면 조금은 후회하며 혐오했던 그 다정 유전자가 자꾸만 수시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러지 마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내면의 목소리가 경계를 높이는 바람에 몇 차례 전원을 다시 뽑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정력 전원이 나간 내 모습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아닌 듯했다. 다시 찾은 나는 예전의 나에게 앙꼬와 같았던 그 다정력을 갈망하고 있었다.
조금씩 다정력을 실험해 보았다. 가장 큰 난제는 나의 두려움이었다. 나의 다정함이 만신창이로 능욕 당해 피칠갑 한 시체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다소간의 모험을 요구하는 믿음.
그리고 이제는 그 전원을 뽑지 않는다. 꽂아두고 사는 삶이 다시 좋아졌다. 대신 강도와 온도를 조절하는 버튼을 달아 업그레이드했다. 이 상황에서, 저 상황에서,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나의 다정력을 알맞은 속도와 온도와 강도로 건네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여전히 서툴지만, 그래서 또 실수하고 실망하고 후회도 하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리고 이 박애주의 오지랖 다정 유전자를 타고난 내가 싫지도 않다. 오히려 좋다. 아마도 나의 다정력은 이제 나를 향해 가장 뜨겁고, 나를 향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리라.
어우, 사랑스럽고 알흠다운 나 녀석 같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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