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긍휼
한 달에 한 번, 내 자궁은 피를 쏟아낸다. 내가 원하든 말든 묵묵히 자리를 준비하고, 그 준비를 허무느라 신음한다. ‘오잉? 왜 이런 얘기를?’ 싶을지도 모르겠다. 헌데 우리는 왜 자궁 이야기를 꺼릴까? 왜 외면하고 싶어할까?
사실 나도 내 자궁에 별 관심이 없었다. 1년 365일 아무 때나 뛰고 싶은 포즈로 뛸 수 있고, 앉고 싶은 자세로 앉을 수 있는, 자궁 없는 이들을 부러워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랬던 내가 자궁의 존재를 진지하게 인식한 건 첫 유산 이후다. 자궁이 꽤나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는 자격미달이야.”
그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자궁을 함부로 예약하고, 선택지가 없는 옵션을 강요한 이들의 목소리였다. 내 안에 있는 자궁에 나를 가두는 이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영영 갇혀있을 것만 같았던 내 자궁은 그 후로 네 번이나 생명을 품었다.
생각해 보면, 작고 연약한 생명이 찾아올 때마다 나의 자궁은 참 야멸차게 독했다. 실소유주인 내가 배신감을 느낄 만큼, 수정란 하나를 중심으로 내 속을 뒤집었다. 온갖 냄새들이 나를 공격했고, 맛의 감각도 무너졌다. 내 침 냄새 마저 견딜 수 없게 싫었다. 그 시절 내 자궁은 참 독했다. 그래서 강했다. 생명의 뿌리를 지켜내느라.
콩알만한 수정란이 자라는 동안 자궁은 거침없이 늘어났다. 살결이 터져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허리가 신음해도 끄떡 없었다. 오장육부에게 억지 양보까지 받아 냈다. 기어코 평수를 넓혀야겠다며. 소화하기 힘든 요구라는 항의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밀어붙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명을 키워냈다.
출산의 순간에 자궁이 실소유주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엄청나다. 크레센도의 진통으로 두드리다가 마지막 순간엔 괴력을 발휘해 길을 낸다. 도저히 통과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 길을 내며 찢어지는 듯한 절정을 지나면, 자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다. 능지처참 행위예술 후에 찾아오는 장엄한 고요.
그 고요는 '내가 너를 찢어 죽이려던 건 아니다'라고 서둘러 말하는 듯 하다. 이제, 자신이 내보낸 생명이 잘 자라도록 잠시 멈춘다. 탯줄이 아닌 어미의 젖으로 자랄 아이의 힘찬 펌프질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돌아간다. 원래의 크기로, 원래의 자리로. 이쯤 되니 자궁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체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사려 깊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자궁’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 복수형이 ‘긍휼’을 뜻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자궁과 긍휼이 탯줄처럼 연결되었다니, 그저 경이로웠다. 그 후로 '자궁'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매 달 신음하는 자궁은 어쩌면 내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네 삶에도 나는 긍휼이라고.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던 괴력의 이면에는, 약하고 작은 자를 향한 품음이 있노라고. 네 속에서 묵묵히 내 본분을 지켜왔노라고. 그 결과 너에게 네 갑절의 긍휼을 선물로 주었노라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자궁에게 배운다.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라면 그 존재가 찾아온 경로 따위는 묻지 않고 품어내는 강함을. 때로는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은 거부감을 주더라도, 기어이 존엄을 지켜내는 독함을. 두툼한 자궁의 벽처럼,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양분이 되는 지혜를. 넉넉히 품기 위해 내가 먼저 자라는 법을. 약하고 작은 존재들은 소화하기 힘들다는 이들에게, 끝끝내 양보를 받아내는 우직함을. '너는 찢어지도록 아프게 하는 자'라 비난 받더라도, 길이 없는 곳에 기필코 길을 내는 법을.
자궁을 닮은 이 여정이 끝나면,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지.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이들의 독립을 기뻐하며. 조용히 작아지는 법을 배우며, 여전히 그 긍휼을 흉내 내며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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