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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가 쌓이면 안달 나는 마음

24시간 독립육아 재택주부의 평행 자아

by 겨자풀 식탁


새벽 6시 반 눈을 뜨면, 나는 또 하루를 '독립 육아 투사'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자정까지 이어지는 99.9프로 '나 홀로 육아' 현실을 '독박 육아' 대신 '독립 육아'라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학대자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을 선택한, '자발적 나 홀로 육아'이기에 '독박'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덧칠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마음이다.


아무리 용맹한 육아 독립투사여도, 저녁 식사 후 설거지 할 즈음 어질러진 주방 싱크대와 카운터를 보면 마음에 안달이 난다. 설거지를 얼른 해치우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대로 다 팽개치고 자판 앞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종일 촘촘하게 들어찬 일정을 따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느라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 뭉치들을 풀어놓고 싶기 때문이다.


'아, 글 당긴다. 아아, 타자질 하고 싶다. 아아아, 설거지하기 싫다'를 외치는 유체이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결국 난장판인 싱크대를 잠시 외면하고 컴 앞에 섰다. ‘내 귀에 글쟁이‘ 목소리를 따라 주방 옆에 늘 놓여 있는 스탠딩 책상으로 향했다. 노트북이 켜지는 순간, 대환장파티 주방은 사라지고 하얀 빈 화면이 나를 부른다. 시선과 발끝이 하얀 공간을 마주했을 뿐인데, 벌써 안정감이 느껴진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오십 개의 별에서 동시에 살아 보고 싶다. 지구별 1호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다. 지구별 2호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세상 다정한 엄마다. 지구별 3호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힙한 의사로 살고 싶다. 지구별 4호에서는 맛깔난 조연 담당 연기자로 살 거다. 지구별 5호에서 나는 소박한 레어템만 만들어 파는 맘씨 좋은 베이커리 사장님이다.


평행 우주까지 갈 것도 없다.


내 안의 자아 행성들은 각기 다른 궤도를 따라 돌며 아슬아슬하게 서로 스쳐간다. 가장 큰 행성은 언제나 ‘작가 자아’다. 서랍별로 쌓아둔 글감들, 앞으로 더 써 내려가고 싶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탐구욕, 읽고 싶은 책들을 모아둔 서랍, 공책에 정리하고 나만의 글을 더하고 싶은 보물 곳간.


싱크대에 쌓인 접시만큼, 내 서랍 속에는 미완의 문장과 읽지 못한 책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빼곡히 채우는 '엄마의 일상'은 매일 '작가 자아'를 세차게 밀어낸다. 너의 모든 욕망을 뒤로하고 다만 의무에 충실하라며 빙빙 돈다. 아무리 그래도 '작가 자아'라는 거대 행성은 절대 튕겨 나가지 않는다. 밀어내면 낼수록 더 큰 힘으로 돌아와 내 마음에 착! 달라붙는다. 그리고 묻는다.


“지구별의 나여, 수시로 글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달 나는 그 마음으로 너는 무엇을 하려는가?”


"빼곡히 채워진 책장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방에 갇혀 영원히 자판만 두드리고 싶나이다."


“어허, 그러하구나. 헌데, 그만큼 떠들었으면 이제 그만 설거지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


"안 그래도 지금 갑니다요, 가."


그래도 언젠가 다시 이 자리에 돌아와, 하얀 화면에 또 다른 우주를 펼칠 것이다. 설거지는 끝나겠지만, 내 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꿈꾸던 그 지구별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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