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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금일까?

그 금빛 무게의 진실

by 겨자풀 식탁


모든 '선택적 침묵'은 사실상 '금빛 특권'이 아닐까 싶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침묵을 선택한다. 손해 볼 필요 없을 때, 상처받을 위험이 있을 때, 애써 부딪힐 이유가 없을 때,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눈치 보기 싫어서, 간편하게 침묵을 선택한다. 그 침묵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침묵하는 나는 편하다. 하지만, 나의 침묵이 누군가의 고립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침묵은 안락한 선택이자, 동시에 특권의 자리에서만 가능한 사치다.


오해를 감수하며 특정 사안을 굳이 언급하는 것. 가만히 있으면 아무 피해도 없을 텐데, 기꺼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손해를 감당하는 것. 소소한 즐거움만으로 충분할 일상을, 타인을 위한 고뇌로 채우는 것. 그렇게 나의 삶의 순간을 잘라 누군가와 나누며, 특권이 가져간 목소리의 공백을 메우는 것.


전자와 같은 이들 덕분에 '중립'이 '악'이 되는 순간이 있다면, 침묵의 공백을 메우는 이들이 있기에 역사는 계속해서 악과 싸우며 전진해 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난한 순간에도, 끈질기게 전진하고 있다.


'선택권'은 어쩌면 그 자체로 '특권'이다.
우아하고 고요한 연회석 위에
잔잔히 드리운 황금빛 천, 그것이 침묵이다.



하지만 성서는 분명 말하고 있다. "너는 말 못 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 31:8).


그럼에도 이 가르침은 10절부터 시작되는 유명한 "현숙한 여인" 이야기에 묻혀버리는 것 같다. "현숙한 여인"이 되라고. "현숙한 여인"을 얻으라고. "현숙한 여인"을 본받으라고. 타인과 공동체에 '유익'을 가져오라고.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덕이 아니라 한다. "현숙한 여인"의 덕목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리저리 잘라 붙여 만들어진 가르침은 자색 도포처럼 우스꽝스럽게 덧씌워진다.


김경일 교수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신호로 '말의 핵심은 외면하고,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만 기억하는 행동'을 지적한다. 상대를 은연중에 깎아내리는 의도적 방식이라고 한다. 일면 일리 있다.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핵심'을 이해하려는 수고를 의미한다.


그러니, 성서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의 태도는 곧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말 못 하는 자와 고독한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니까. 그 자리에서 갖는 영향력의 양태와 크기가 다르니까. 하지만, "말 못 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겠다는 마음은 어느 자리에서나 품을 수 있지 않을까. 품어야 하지 않을까. 성서에 진심으로 귀 기울인다면.


성서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 가르침을 삶에 오롯이 담아내며 살고 싶다. 누군가의 침묵을 배경 삼아 고요를 누리기보다, 금빛 무게로 짓누르는 고통스러운 침묵의 공백을 채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 누구의 침묵을 듣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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