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그리고 베트남이 최강국들을 이긴 이유
호찌민 1군 리버사이드 로터리. 사이공강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는 한 장군의 동상이 있다.
베트남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오래 살아온 교민도 반드시 지나치는 그 동상의 주인공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陳興道)다.
하노이에도, 다낭에도, 하이퐁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베트남 어느 도시에나 '쩐흥다오 거리'가 있다.
왜 베트남인들은 이 인물을 그토록 기리는가.
호찌민 다음으로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장군은, 13세기에 당시 지구상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몽골 제국의 침략을 세 번이나 막아냈다.
BBC는 그를 세계 100대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이순신, 쩐흥다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면, 더 큰 질문이 보인다.
베트남은 역사상 중국, 몽골, 프랑스, 미국 각 시대 최강국들을 상대로 모두 살아남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 핵심은 무엇인가.
13세기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 폴란드까지 쓸어버린 군대였다.
당시 몽골군을 정면으로 막아낸 나라는 극소수다.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그리고 베트남이었다.
1차 침략(1257년)은 우리양카다이가 이끄는 몽골군 3만 명으로 시작됐다.
베트남 쩐 왕조는 수도 탕롱을 비우고 후퇴했다. 몽골군은 빈 수도를 점령했지만, 보급이 끊기고 열대성 기후와 질병에 시달리다 철수했다. 1차전은 베트남의 '버팀'으로 끝났다.
2차 침략(1285년)은 규모가 달랐다. 쿠빌라이 칸의 아들 토곤이 50만 대군을 이끌었다.
수도가 다시 함락됐고, 조정의 신하 대부분이 항복을 권유했다. 이때 쩐흥다오가 인종 황제 앞에서 말했다. '항복을 결정하셨다면, 일단 신의 목부터 베어주소서.' 그리고 장병들에게 쓴 격문
〈격장사문(檄將士文)〉이 돌았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격문을 읽은 병사들의 사기가 되살아났다.
베트남군은 치고 빠지는 청야전술(淸野戰術)로 몽골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무더위와 열대성 질병이 몽골군을 갉아먹었고, 결국 토곤은 철수했다. 1285년 6월, 탕롱이 탈환됐다.
3차 침략(1287~1288년)이 왔다.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9만 정병에 수십만 석의 식량을 실은 보급 함대까지 갖췄다. 쩐흥다오는 먼저 보급 함대를 격파했다. 식량이 끊긴 몽골 육군은 탕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철수를 시작했다.
퇴각하는 몽골 함대가 향하는 길목, 박당강(白藤江). 하롱만과 연결된 이 강은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하고 수심이 얕다. 쩐흥다오는 강바닥에 미리 철제 말뚝을 촘촘히 박아두었다.
밀물 때 몽골 함대를 강 상류로 유인했다. 썰물이 되자 베트남 함대가 반격에 나섰다.
수위가 낮아지면서 몽골 함선들이 말뚝에 걸려 좌초하기 시작했다. 양안에 매복해 있던 대군이 일제히 공격했다. 몽골 함대는 전멸했다. 지휘관 오마르가 포로로 잡혔다.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쩐흥다오의 전략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정면으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지지 않는 것이 먼저다.
그의 저서 《병서요략(兵書要略)》은 단순한 병법서가 아니었다.
베트남의 지형에 맞는 함정 설치법, 유인책,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으로, 이를 병사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나누어줬다. 전쟁의 주체가 군인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여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가 반복적으로 구사한 전술은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수도를 비우고 식량과 자원을 철수시켜, 침략군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몽골군은 빠르고 강하지만 보급에 취약하다. 땅을 내어주되 시간을 빼앗는다. 수도를 빼앗겼으나 전쟁은 지지 않았다.
박당강 전투의 말뚝 전술은 즉흥이 아니었다. 같은 강에서 350년 전, 응오꾸옌(938년)이 남한의 침략을 같은 방식으로 격파했다. 쩐흥다오는 그 역사를 알고 있었고, 같은 전장을 선택했다.
지형을 외운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읽었다.
그의 전략의 핵심은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라'는 임종 유언에 집약돼 있다. 전쟁은 군사력의 싸움이기 이전에 민심의 싸움이라는 통찰이었다.
이것이 쩐흥다오를 단순한 장군이 아닌, 전략가로 만든 이유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에도 베트남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5세기에는 명나라의 지배(1407~1427년)가 20년간 이어졌다. 레러이(Lê Lợi)가 이끄는 저항군이 게릴라전으로 명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독립을 되찾았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됐다. 그 저항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
세계 최고의 식민지 군대 중 하나였던 프랑스군이 54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됐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끈 베트민군의 전술은 쩐흥다오의 것과 닮아 있었다. 정면 공격이 아닌, 포위와 차단. 보급을 끊고 기다리는 것.
그리고 베트남 전쟁(1964~1975년). 미국은 역사상 가장 많은 폭탄을 이 땅에 쏟아부었다.
전쟁 기간 베트남에 투하된 폭탄의 양은 제2차 세계대전 전체 사용량의 세 배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겼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됐다.
미국이 진 이유를 분석한 연구는 수없이 많다. 그 중 하나의 결론이 있다.
미국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 졌다.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군사적 열세를 보완했고, 국민들의 지지가 게릴라를 물과 물고기처럼 지탱했다. 구찌 땅굴은 25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하 세계였다. 탱크가 위를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는 베트남의 붉은 토양 위에 파인 이 땅굴 네트워크는, 인간의 의지가 화력보다 오래 버팀을 증명했다.
주목할 것은 쩐흥다오의 《병서요략》이 20세기에도 활용됐다는 기록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상대한 베트민과 베트콩의 기본 전략서 중 하나가 바로 이 13세기 병법서였다.
700년 전의 전술이 현대전에서도 작동했다. 역사가 교과서가 아니라 작전 계획서가 된 것이다.
① 이기려 하지 않았다 — 지구전의 논리
베트남이 상대한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빠른 결전을 원했다. 몽골은 속전속결로 제국을 넓혔다. 미국은 화력으로 단기 승리를 노렸다. 베트남은 그 전제를 거부했다. 수도를 버리고, 땅을 내어주고, 시간을 훔쳤다. 침략자는 점령지를 유지하는 비용이 쌓이면서 스스로 무너진다. 지는 척하다가 이기는 전략. 이것이 베트남 전쟁 방식의 핵심이다.
② 지형이 전략이었다 — 자연을 무기로 삼았다
베트남의 지형은 침략자에게 불리하다. 북쪽은 험준한 산악 지대, 남쪽과 중부는 정글과 습지, 강과 삼각주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쩐흥다오는 이 지형을 읽었다. 박당강의 조수간만, 밀림의 복병, 보급로가 끊어지는 열대 기후. 이 지형 안에서 싸울 수 있는 쪽이 이긴다. 몽골 기병의 기동력도, 미군의 항공 화력도, 지형 앞에서는 제한된다. 베트콩의 구찌 땅굴은 이 전통의 현대판이다.
③ 민심이 군사력이었다 — 백성이 전쟁의 주체였다
쩐흥다오가 《병서요략》을 백성들에게도 나눠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의 주체가 군인이 아니라 국민 전체일 때, 침략자는 끝이 없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직면한 문제도 같았다. 군복을 입은 적과 농민을 구별할 수 없었다.
민간인이 정보를 제공하고, 식량을 나눠주고, 땅굴을 판다. 민심을 얻은 군대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사라진다. 민심을 잃은 군대는 아무리 강해도 무엇과 싸우는지를 모른다.
호찌민 리버사이드 로터리의 쩐흥다오 동상은 강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다.
바익당강은 하롱만 근처에 있고, 저 손가락은 그 방향을 향한다는 해석도 있다.
몽골 함대를 무찌른 강을 가리키며, '우리는 거기서 이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베트남인들이 그 동상 앞에서 무엇을 보는지는 그들의 역사 전체와 연결돼 있다. 천 년의 중국 지배, 몽골의 세 번 침략, 백 년의 프랑스 식민 지배, 미국과의 전쟁. 매번 강대국이 왔고, 매번 베트남은 살아남았다.
쩐흥다오는 그 긴 생존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에 서 있는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서로 쩐흥다오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남쪽에서는 500동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었다. 북쪽에서는 그의 전술을 미군과의 전쟁에 적용했다.
이념이 달라도 이 이름만은 양쪽이 모두 기댔다. 그것이 진정한 국민 영웅의 증거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중 하나가 됐다.
미국과 수교를 맺고, 미국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한다.
싸웠던 상대와 교역 파트너가 됐다. 베트남은 살아남았고, 그 이후에는 도약하고 있다.
다윈이 '적자생존'을 말했을 때, 그것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었다. 베트남의 전쟁 역사는 이 원리의 인간판이다.
몽골은 강했다. 미국은 강했다. 베트남은 그들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은 자신이 싸울 수 있는 방식으로 싸웠다. 지형을 알았고, 시간을 이용했으며, 민심을 잃지 않았다. 쩐흥다오는 이 방식을 13세기에 완성했고, 700년 뒤의 전쟁에서도 그 방식이 통했다.
강함은 비교 가능한 숫자다. 얼마나 많은 군대, 얼마나 강한 무기. 그러나 생존은 비교 불가능한 의지의 문제다. 베트남인들은 그 의지를 역사로 증명했고, 쩐흥다오의 동상은 매일 그 역사를 강 쪽으로 가리키고 있다.
호찌민의 리버사이드 로터리를 지날 때 그 동상을 다시 한번 보자.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강이 있고, 강 너머에는 역사는 계속 되고 있으며,
그 역사의 핵심에는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