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유교 문화의 뿌리, 닌빈의 시대에서 탕롱의 탄생까지
1010년 7월. 리꽁우언(Lý Công Uẩn)은 배 위에 서 있었다. 베트남 최초의 수도 호아르(Hoa Lư)를 떠나 북쪽으로 홍강을 따라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배가 다이라(Đại La) 성터 앞에 멈추었을 때 황룡(黃龍) 한 마리가 배에서 솟구쳐 하늘로 올랐다. 리꽁우언은 이것을 하늘의 징조로 읽었다.
그는 이 땅의 이름을 '탕롱(Thăng Long)', 즉 '용이 오른다'로 바꾸고, 여기에 새 수도를 세웠다.
이 하나의 결정이 베트남 역사의 축을 바꿨다. 방어 요새의 시대가 끝나고, 문명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문명의 중심에 유교(儒敎)가 놓였다.
베트남 유교 문화를 이해하려면, 탕롱이 탄생하기 전의 세계 닌빈(Ninh Bình)의 호아르부터 읽어야 한다.
베트남에 유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한(漢)나라의 지배 시절이다.
서기 1세기부터 10세기까지, 베트남 북부는 중국의 직접 통치하에 놓였다.
한나라, 오나라, 당나라가 차례로 이 땅을 지배하는 동안, 중국의 행정 제도와 함께 유교 사상이 이식됐다.
한자가 문자로 사용됐고, 관료 제도가 유교 원리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베트남인에게 유교는 단순한 지배 이념의 수입이 아니었다.
지배받는 동안에도 베트남 고유의 촌락 공동체, 여성의 사회적 역할, 구어 문화는 유교와 완전히 융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지됐다. 베트남 민중은 유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신과 조상을 함께 섬겼다.
이 복층 구조가 베트남 유교의 특징이 된다. 중국과 같은 유교이지만, 같지 않은 유교다.
939년, 응오꾸옌(Ngô Quyền)이 박당강 전투에서 남한(南漢) 군대를 격파하며 천 년 가까운 중국 지배가 끝났다.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나라는 곧 혼란에 빠졌다.
응오 왕조가 무너진 뒤 12명의 군벌이 각 지방을 장악하는 이른바 '십이사군(十二使君)의 난'이 터진다.
이 혼란을 종식시킨 인물이 딘보린(Đinh Bộ Lĩnh)이다.
베트남에 자주 가보신 분들은 들어본 그 거리 이름 딘티엔황(Đinh Tiên Hoàng),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그리고 그의 근거지가 닌빈, 호아르였다.
닌빈(Ninh Bình)은 하노이 남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나라는 후삼국시대 말기를 지나 고려 초·중기 때인 968~1009년까지, 베트남의 딘(Dinh), 레(Le)의 수도였던 지역이다.(사실 닌빈이전의 베트남은 부족국가에 가까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닌빈의 역사부터 공부하는게 맞다고 본다. 그 이전엔 설화와 전설의 역사 아닐까)
지금은 석회암 기암절벽과 물길이 어우러진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지만, 10세기에 이 땅이 선택된 것은 바로 그 지형 때문이었다. 가파른 절벽과 좁은 통로가 천연 요새를 이루는 이 지역은, 적의 침입을 막기에 최적이었다.
968년, 딘보린은 12군벌을 모두 제압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국호를 '다이꼬비엣(Đại Cồ Việt, 大瞿越)'으로 정하고, 호아르를 수도로 삼았다. 딘티엔황(丁先皇)이라 불리게 된 그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독립 통일 왕조를 세운 군주였다. 중국을 향해 처음으로 '황제(皇帝)' 칭호를 스스로 선포했으며, 중국과의 외교에서 완전한 독립국임을 천명했다.
호아르의 궁성(宮城)은 석회암 절벽과 강으로 이루어진 자연 요새 안에 세워졌다.
성의 구조는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나뉘었으며, 성 안에는 왕궁과 사찰이 함께 배치됐다.
딘 왕조는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왕실 사원을 건립했다.
이 시기의 베트남 종교관은 불교와 도교, 그리고 토착 신앙이 혼합된 형태였다.
유교는 아직 통치 이념의 전면에 서 있지 않았다.
그러나 딘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979년, 딘보린과 그의 맏아들 딘리엔(Đinh Liên)이 암살됐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혼란 속에 내부가 흔들렸다. 이때 실권을 쥔 장수 레호안(Lê Hoàn)이 황위를 차지하고 '전(前)레 왕조'를 열었다. 수도는 그대로 호아르였다.
980년, 전레 왕조의 레호안(레다이한, Lê Đại Hành)은 가장 결정적인 시험을 맞았다.
송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온 것이다. 레호안은 박당강에서 이를 물리쳤고, 남쪽의 참파(Champa) 왕국도 격퇴했다. 외부의 위협을 막아낸 뒤 그는 농업 기반을 강화하고 호아르를 중심으로 국가 체계를 정비했다. 그러나 전레 왕조 역시 왕실 내부 갈등으로 흔들렸다.
1009년, 전레 왕조 마지막 황제의 폭정에 맞서 관료와 승려들의 지지를 받은 리꽁우언이 왕위에 올랐다.
리 왕조(Lý dynasty)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010년, 그는 수도를 호아르에서 탕롱으로 옮겼다.
닌빈, 호아르의 시대가 끝났다.
리태조(리꽁우언)가 천도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겹으로 짜여 있다. 표면적으로는 지형의 문제였다.
호아르는 석회암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에 자리 잡아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농지가 협소했다. 인구가 늘고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수도로서의 한계가 명확해졌다.
더 깊은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호아르는 딘 왕조와 전레 왕조의 본거지로, 토착 호족 세력의 뿌리가 깊었다. 새 왕조를 일으킨 리태조가 진정한 전국 통치권을 확립하려면, 그들의 텃세에서 벗어난 중립적 토대 위에 서야 했다. 홍강 삼각주 중심부인 탕롱 지역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관료층과 상업 세력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이들과 결합하는 것이 장기 집권의 기반이 됐다.
리태조는 천도 직전 '천도조서(遷都詔書)'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단순한 행정 명령이 아니라, 새 수도의 정통성을 하늘의 뜻으로 정당화하는 유교적 문서였다. 조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대라성(大羅城)의 땅은 사방이 막힘이 없고 지형이 평탄하며, 땅이 높고 밝으며 백성들이 홍수와 재해를 입지 않는다. 만물이 번성하고 풍성한 이곳은 사해의 요충이자 만세를 위한 제왕의 도읍지다.' 이것은 풍수(風水)와 유교 천명(天命) 사상이 결합된 선언이었다.
배 위에서 황룡이 승천했다는 전설은, 새 수도에 하늘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서사였다.
이름을 '탕롱(昇龍)', 즉 '용이 오른다'로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탕롱은 1010년부터 1802년 응우옌 왕조가 후에(Huế)로 천도할 때까지 약 800년간 베트남의 수도로 남았다.
지금의 하노이가 그 자리다.
수도가 탕롱으로 옮겨오면서, 베트남의 통치 이념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리 왕조는 불교를 여전히 숭상했지만, 국가 운영의 틀은 유교 행정 체계로 정비해 나갔다.
그 과정의 상징적 사건이 1070년 문묘(文廟)의 창건이다.
탕롱 황성의 남쪽, 지금의 하노이 동다(Đống Đa) 지구에 리인종(Lý Nhân Tông)이 공자를 모시는 사원을 세웠다. 이것이 문묘(文廟, Văn Miếu)다. 주공(周公)과 공자, 그리고 72현인을 모시는 공간이자, 왕실 자제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6년 뒤인 1076년에는 문묘 안에 국자감(國子監, Quốc Tử Giám)이 설치됐다. 베트남 최초의 국립 대학이었다.
국자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졌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 들어서면 타고 온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국의 서원 문화와 동일한 유교적 공간 언어다.
같은 한자문명권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식과 예(禮)를 표현하는 문화가 베트남에도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과거제(科擧制)는 1075년 처음 실시됐다. 신분이 아닌 학식으로 관료를 선발하는 이 제도는, 유교 문명의 핵심적 혁신이었다. 서양이 혈통과 세습으로 지배층을 재생산하던 시기에, 동아시아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 베트남의 과거제는 처음에 오경(五經) 위주의 시험으로 시작했다가, 15세기 이후 성리학(性理學)이 심화되면서 사서(四書)가 핵심 교과로 자리 잡았다.
문묘 경내에는 지금도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가 82기 남아 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진사(進士)들의 이름, 출신지, 합격 연도를 새긴 비석이다. 거북 등 위에 세워진 이 비석들은 베트남인들에게 학문과 지식에 대한 경외를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수험생들이 시험 전 문묘를 찾아 거북 석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합격을 빈다. 천 년 전의 유교 공간이 현재의 의례로 살아 숨 쉰다.
베트남은 중국, 한국과 함께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에 속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유교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 다른 나무다.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베트남 유교는 불교와 훨씬 오래, 더 긴밀하게 공존했다. 리 왕조와 쩐 왕조는 불교를 국교에 가까운 수준으로 장려하면서도, 동시에 유교 행정 체계를 운영했다. '삼교(三敎) 병립'이 베트남의 기본 태도였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질서, 도교의 자연관이 한 사회 안에 층층이 쌓였다.
이 혼합이 베트남 정신 문화의 깊이를 만들었다.
둘째, 여성의 위상이 달랐다. 유교 질서는 원칙적으로 가부장적 위계를 강조하지만, 베트남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할과 가정 내 실권은 한국·중국보다 강했다. 이것은 중국 지배 이전부터 존재하던 베트남 고유의 모계적 전통이 유교와 타협하며 살아남은 결과다. 영웅 여성을 기리는 하이바쯩(Hai Bà Trưng, 두 자매 장군) 전설이 지금도 국가적으로 경배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베트남 유교는 조선처럼 성리학 일원론으로 경직되지 않았다. 조선이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은 유불도 삼교와 토착 신앙을 함께 끌어안았다. 이 유연성이 베트남 사회의 탄성(彈性)이자, 외세 침략과 문화 압박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한자(漢字)는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공식 문자였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한자를 토대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쯔놈(Chữ Nôm)'을 만들었다. 조선의 훈민정음처럼, 지배 문자를 빌려 자국의 언어를 표현하는 문화적 독자성의 발현이었다. 20세기에 로마자 표기법인 꾸옥응으(Quốc Ngữ)로 교체되면서 한자·쯔놈 문화는 단절됐지만, 그 정신적 유산은 베트남의 제사 문화, 가족 윤리, 교육 중시 풍토에 여전히 흐른다.
지금 닌빈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탐꼭(Tràm Cốc)의 물길과 짱안(Tràng An)의 절경을 보러 간다.
그 석회암 절벽과 논밭 사이에, 딘보린이 세운 호아르의 왕궁터가 남아 있다. 딘티엔황(Đinh Tiên Hoàng) 사원과 레다이한(Lê Đại Hành) 사원이 나란히 서 있다.
베트남 최초의 두 황제를 모신 이 공간이 지금은 관광지가 됐다.
닌빈과 호아르는 방어의 시대를 상징한다. 외세로부터 막 독립한 나라가 석회암 절벽 뒤에 숨어 힘을 기르던 시절. 그 시절의 선택이 있었기에, 탕롱으로의 천도가 가능했다. 방어에서 문명으로의 전환은, 닌빈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했다.
탕롱 황성(昇龍皇城)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해는 탕롱 천도 1000주년이었다. 베트남은 대규모 기념 행사를 열었다. 천 년 전 리태조가 배 위에서 황룡을 보았던 그 강가에서, 현대 베트남이 천 년의 역사를 기렸다.
문묘 앞 거북 석비의 머리는 지금도 반질반질하다. 합격을 빌며 손을 얹은 수험생들의 손때다.
유교가 가르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통한 인정(人定)이었다.
나라가 인재를 기르고, 인재가 나라를 이끄는 구조.
그 구조를 최초로 제도화한 것이 리 왕조의 탕롱이었다.
닌빈의 절벽이 베트남을 지켰고, 탕롱의 용이 베트남을 키웠다.
그 두 장소를 잇는 1010년의 선택이 베트남 문명의 중대한 원류이다.
*제가 베트남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것은 저희 집사람이 베트남에서 유명한 역사 선생님이십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제가 직접 찍은 닌빈의 사진들입니다. 닌빈의 풍경을 감상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