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속의 화교들

내꺼인듯 내꺼아닌 내꺼같은 너

by 무타리

오래전이지만 미국에 살 때였다.

하워드 스턴 쇼 (The Howard Stern Show)를 보다가 이상한 코너를 본 적이 있다.

동양인 남녀 여러 명을 무대에 세워 놓고 패널들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 맞히는 에피소드였다

내가 봐도 '저분은 영락없이 한국 사람'이다 싶은 사람도 있었고,

'저 사람은 베트남인, 이 분은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인가' 하고 헷갈리는 사람도 있었다.

패널들도 진지하게 추리하며 국적을 댔다.

그런데 정답이 나왔을 때 스튜디오가 웃음바다가 됐다.

전원 중국인이었다.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동양인의 얼굴 생김새가 얼마나 비슷한지 헷갈려 하는 서양인들의 모습도 웃겼지만

동시에 내가 봐도 그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단번에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숨겨진 사실이 있었다.

"사실은 오랜 혼혈과 이주와 정착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다

베트남에 오래 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남부 지방 특히 껀터나 호찌민, 그 인근 일부 지역에는 유독 한국인을 닮은 사람들이 많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타임머신을 타고 3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가 있다.


명나라가 무너지던 날, 그들은 배에 올랐다

1644년. 중국에서 명나라가 청나라에 무너졌다.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명나라 유신(遺臣)들, 장수들, 그 군사들. 고개를 숙이고 새 왕조를 섬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싸워서 죽거나, 도망치거나.

1679년, 명나라 장수였던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彥迪)이 결단을 내렸다.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어 50척의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남쪽, 베트남이었다. 한 왕조의 패잔병이 아닌, 절개를 지킨 망명자들로서.

베트남 응우옌 왕가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정치적 망명자에 가까운 이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남부 개발에 활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왕은 이들에게 땅을 내려 남부에 정착하게 했다.

지금의 동나이(Đồng Nai)성 지역이 첫 정착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밍흐엉(Minh Hương, 明香)'이라고 불렀다. '명(明)나라의 향기'라는 뜻이다.

고국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은 지켜가겠다는 의지였다.

훗날 이 한자는 '명(明)나라의 고향(鄕)'으로 바뀐다. 향기에서 고향으로 발음은 같고 뜻만 달라졌다.


호이안의 다섯 개 회관 — 베트남 화교 역사의 시작

그런데 이보다 훨씬 일찍, 중국인들이 베트남에 정착한 곳이 있다.

호이안(Hội An)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지지만,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곳은 동남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의 핵심 무역항이었다.

중국, 일본, 네덜란드, 인도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그 중 중국인들이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뿌리를 내렸다.

호이안의 구도심을 걸으면 다섯 개의 회관(會館)을 만난다.

광동회관, 복건회관, 중화회관, 조주회관, 해남회관. 모두 중국 각 성(省) 출신 화교들이 자신들의 향우회 겸 사당으로 세운 건물이다.

광동 출신, 복건 출신, 조주 출신, 하이난 출신.

같은 중국인이지만 출신 지역이 달라 회관도 달랐다.

회관 안에는 관우 벽화와 거대한 용 석상이 있다. 향 연기가 늘 피어오른다.

수백 년 전 이 땅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고향의 신에게 기도한 공간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호이안의 화교들 중 일부는 점차 남쪽으로 이동했다.

무역이 활발한 곳을 따라,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흐름을 따라.

그리고 명나라 유민들과 합류하면서 베트남 남부에 새로운 중국인 사회를 만들었다.


베트남 여인을 추앙(?)하라

1802년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면서 이 중국인들의 처우가 정식으로 제도화된다.

왕조는 중국계 이민자들과 베트남 여성 사이의 혼혈 자손을 '명향(明鄕)'이라는 집단으로 공식 편성했다.

경제 개발과 인구 증가를 위해 이들을 베트남 사회에 통합시키는 정책이었다.

쉽게 말해 왕조가 중국인들에게 '베트남 여인과 결혼하고, 이 땅에 뿌리내려라'는 왕명를 내린 것이다.

1849년에는 '명향'에게 관리 등용 시험 응시 자격까지 부여했다.

베트남 공직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인이지만 베트남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왕조가 열어준 셈이었다.

그리고 사실 응웬왕조가 명나라 사람들의 혼합정책과 이주정책을 시행한 것은 중국인에 대한 두렴움이 더 앞서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의 피와 베트남인의 얼굴 생김새가 섞였다.

베트남 남부 사람들, 특히 껀터나 메콩 델타 일대에 한국인을 닮은 듯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역사(?)의 결과다.

하워드 스턴 쇼 패널들이 맞히지 못한 그 얼굴들의 역사.


호찌민 속의 작은 중국

베트남 남부 화교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 있다.

호찌민시 5군과 6군 일대에 펼쳐진 쩌런(Chợ Lớn)이다. 베트남어로 '큰 시장'이라는 뜻이다.

1778년, 비엔호아에 살던 화인들이 떠이선 왕조의 보복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명나라 유민의 후손들, 광동·복건·하이난에서 건너온 새 이민자들이 합류하면서 거대한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졌다. 면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쩌런의 화교들은 베트남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상업, 금융, 무역을 장악했다.

그 중 복건성 출신 사업가 쭈호아(Chú Hỏa, 본명 황문화)는 2만 채에 이르는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가 됐다. 그의 저택은 지금 호찌민시 미술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직전까지 남베트남에는 약 120만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그 중 110만 명이 사이공 주변에 집중됐고, 70만 명이 쩌런에 살았다. 쩌런은 도시 안의 도시였다.


모든 것을 잃고 바다로

1978년, 상황이 급변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그에 맞서 중국이 1979년 베트남 북부를 공격하면서 중국-베트남 관계가 무너졌다. 베트남 정부는 화교들을 잠재적 적국의 편으로 봤다.

전쟁으로 도시가 함락된대다 이제는 나의 원류가 문제가 됐다. 이들의 당시 심경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강제 추방 혹은 강제 등록이 시작됐다. 베트남 시민권을 취득하거나 나라를 떠나야 했다.

약 30만 명의 화교가 베트남을 떠났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쩌런을 등졌다. 이들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소위 '보트피플'의 상당수가 실은 베트남 화교 출신이었다.

한국 근해에도 그 배들이 나타났던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떠난 사람들은 홍콩으로, 싱가포르로, 말레이시아로, 미국으로 흩어졌다.

모국인 중국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중국도 가난했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바다 위에 있었다.


추방당한 자들이 돌아왔다

1986년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개방 정책을 선언하면서 시장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떠났던 화교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 빈손이 아니었다. 홍콩에서, 싱가포르에서, 미국에서 쌓은 자본과 경험을 들고 왔다.

추방당한 땅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쩌런의 잠겨 있던 사원들이 하나씩 문을 열었다.

온랑사원(온랑회관)도 그때 다시 열렸다. 화교들이 돌아오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쩌런은 빠르게 되살아났다. 그들에게 상업과 무역은 체질이었다.

수백 년의 축적이 있었다. 봉인됐던 것이 풀리는 것처럼, 쩌런의 시장 기능이 다시 작동했다.

이제 쩌런에 가면 중국어 간판이 빼곡하다. 광동어, 복건어, 조주어가 들린다.

한자와 베트남어가 뒤섞인 간판들 아래로 사람들이 오간다.

베트남 국적이지만 스스로를 화인(華人)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경계도 흐릿해진 사람들이 함께 산다.


경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 베트남에 살고 있는 호아족= 화교(호아족, 華族, 베트남 공식 소수민족)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명향(明鄕) 후손들처럼 법적으로는 '낀족(다수 베트남 민족 = Viet)'으로 등록된 사람들, 몇 대에 걸쳐 베트남 여성과 혼혈되어 자신이 중국계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많다.

내가 만난 베트남 친구들과 어느 정도 친밀감이 쌓이고 호구조사를 해보면 열중 한 둘은 할아버지 세대의 분들이 다 화교분들이셨다 그만큼 얼마나 뿌리깊은 흐름이 있었는지 보인다.

호찌민시 미술박물관을 들어서면 호화로운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이 쭈호아의 저택이었다는 걸 아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그리고 시장 골목에서 광동어로 흥정하는 할머니의 집안이 명나라 장수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베트남 남부에서 한국인을 닮은 얼굴을 만날 때, 나는 가끔 그 얼굴 뒤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한다.

명나라가 무너지던 날 배에 올랐던 사람들, 왕의 명령으로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

호이안 회관에서 향을 피우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사람들, 1978년 바다 위에서 표류하던 사람들.

그 모든 시간이 사람의 얼굴 안에 쌓여 있다.

동양인 얼굴은 다 비슷하다는 하워드 스턴 쇼의 우스개 뒤에는,

사실은 그 비슷함을 만들어낸 수백 년의 이주와 역사가 있다.

20260418162848.jpg 호치민시 미술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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