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삶의 무대로
베트남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은 내가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다.
총성이 들리고, 폭발이 일어나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들이 지나간다.
혹은 반대로 너무 아름답게 윤색된 이국적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 영화는 오랫동안 베트남을 두 가지 방식으로만 다뤘다.
전쟁터, 아니면 이국적 배경. 그 어느 쪽도 내가 사는 베트남과는 달랐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영화들이 나타났다.
베트남을 전쟁이 아닌 삶의 공간으로 보는 영화들. 모두 베트남 밖에서 본 시선들이다.
그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이 글에서 다루는 영화들
▶ 전쟁과 미국의 시선
·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 / 코폴라)
· 플래툰 (Platoon, 1986 / 올리버 스톤)
· 풀 메탈 재킷 (Full Metal Jacket, 1987 / 큐브릭)
· 굿모닝 베트남 (Good Morning Vietnam, 1987 / 로빈 윌리엄스)
· 하늘과 땅 (Heaven & Earth, 1993 / 올리버 스톤)
▶ 유럽의 시선 — 식민지와 사랑
· 인도차이나 (Indochine, 1992 / 레지스 바르니에, 까트린 드뇌브)
· 연인 (The Lover, 1992 / 장자크 아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원작)
· 콰이어트 아메리칸 (The Quiet American, 2002 / 마이클 케인)
▶ 베트남인의 시선
· 그린 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 1993 / 쩐안흥)
· 씨클로 (Cyclo, 1995 / 쩐안흥 · 베니스 황금사자상)
· 여름의 수직선에서 (The Vertical Ray of the Sun, 2000 / 쩐안흥)
▶ 현대 베트남이 배경인 영화
· 콩: 스컬 아일랜드 (Kong: Skull Island, 2017 / 베트남 현지 촬영)
베트남 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세 편이 있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79),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1986), 큐브릭의 〈풀 메탈 재킷〉(1987). 세 편 모두 다른 방향에서 같은 전쟁을 다루며 미국 영화사에 남는 작품이 됐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베트남전으로 옮긴 것이다. 미군 장교가 정글 속 미치광이 커츠 대령을 찾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영화의 배경은 베트남이지만 촬영은 필리핀에서 이루어졌다. 코폴라는 완성에 3년 이상을 쏟았다. 발가벗은 전쟁의 광기와 인간의 어둠을 담은 이 영화는 역대 최고의 전쟁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플래툰〉은 올리버 스톤이 실제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선한 중사와 악한 중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병의 시선으로 전쟁의 도덕적 혼란을 그렸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고, 제작비 600만 달러로 북미에서만 1억 3,900만 달러를 벌었다. 포스터에서 두 팔을 하늘로 뻗고 쓰러지는 윌렘 대포의 장면은 전쟁 영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다.
〈풀 메탈 재킷〉은 큐브릭 특유의 차가운 시선으로 전쟁을 해부했다. 2부로 나뉘는 구조가 독특하다. 훈련소에서 인간이 전쟁 기계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실제 전장. '진짜 베트남'을 찍겠다며 런던 폐공장에서 촬영했다는 것도 큐브릭다운 역설이다.
세 편이 모두 미국인의 시선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조연이거나 적이거나 배경이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지만 그 고발의 주체는 언제나 미국 병사다. 베트남 민간인의 시선은 없다.
〈굿모닝 베트남〉(1987)은 같은 배경에서 다른 톤을 택했다.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하는 미군 DJ가 전쟁의 광기 속에서 라디오로 웃음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코미디와 비극이 뒤섞인 이 영화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조금 더 인간적으로 등장한다. 그래도 중심은 미국인이다.
미국이 전쟁으로 베트남을 기억할 때, 프랑스는 식민지로 기억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영화로 만들었다.
〈인도차이나〉(1992)는 프랑스 여배우 까트린 드뇌브가 주연을 맡은 서사시다. 1930년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고무농장을 운영하는 프랑스 여인과 그녀가 입양한 베트남 왕녀,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젊은 해군 장교의 이야기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경이 배경으로 펼쳐지는 동안, 독립운동의 불씨가 타오르는 역사가 흐른다. 식민지배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서 베트남의 역사적 고통도 함께 담았다.
같은 해 나온 〈연인〉(The Lover, 1992)은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했다. 1920년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중국계 부호 아들의 금지된 사랑. 주인공 중국 남자 역을 홍콩 배우 양가휘가 맡았다.
감독 장자크 아노는 촬영 1년 전부터 베트남에 머물며 현지를 재현했다. 메콩강 위 페리에서 처음 만나는 두 사람, 무너져가는 식민지 하층 가옥, 사이공의 좁은 골목. 그 장면들이 지금도 베트남 여행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가장 관능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콰이어트 아메리칸〉(The Quiet American, 2002)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52년 사이공, 영국인 기자와 이상주의적인 미국인 요원, 그리고 베트남 여인의 삼각관계. 마이클 케인이 영국인 기자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냉전 시대 강대국의 개입이 한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차분하게 그렸다. 1950년대 사이공의 분위기를 가장 정교하게 재현한 영화 중 하나다.
1993년, 한 편의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그린 파파야 향기(The Scent of Green Papaya)〉. 감독은 베트남계 프랑스인 쩐안흥(Trần Anh Hùng)이었다.
이 영화는 1950년대 사이공을 배경으로 한 어린 가정부 무이의 이야기다. 전쟁도 없고 정치도 없다. 파파야를 써는 손, 개미가 지나가는 마루, 이른 아침 부엌에서 흐르는 물. 베트남의 일상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처음으로 화면에 담겼다.
쩐안흥은 1962년 베트남 미토에서 태어나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12살에 이민을 떠난 그가 훗날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작품 〈씨클로〉(Cyclo, 1995)는 더 거칠었다. 호찌민 도이머이 개방 이후의 어두운 이면, 가난, 범죄, 폭력. 도심 빈민가에서 씨클로를 몰며 생계를 잇던 청년이 범죄 조직에 끌려드는 이야기. 홍콩 배우 양조위가 갱단의 시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95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베트남에서는 상영 금지를 당했다. 베트남의 어두운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였다. 세계에서 인정받았지만 조국에서 거부당한 역설.
영화 속에서 양조위가 등장하는 몽환적인 장면에 라디오헤드의 'Creep'이 흘렀다. 그 장면 덕분에 한국에서도 'Creep'이 크게 알려졌다. 〈씨클로〉는 영화와 음악을 동시에 세계에 알린 작품이 됐다.
세 번째 〈여름의 수직선에서〉(2000)는 하노이 세 자매의 이야기다. 전쟁도 없고 폭력도 없다. 어머니 기일에 모이는 가족, 서로의 비밀, 뜨거운 여름날의 정서. 베트남이 마침내 완전한 삶의 공간으로 화면 위에 올라왔다.
쩐안흥의 3부작이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베트남을 전쟁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도 미국도 아닌,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눈으로. 그래도 그는 보트피플이었고, 이민자였고, 베트남계 프랑스인이었다. 완전한 내부인도 아니었다. 그 어중간한 자리가 오히려 독특한 시선을 만들었다.
2017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콩: 스컬 아일랜드〉가 개봉했다. 콩이 사는 섬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섬의 주요 배경으로 베트남이 등장했다.
영화 제작진은 닌빈(Ninh Bình)과 퐁냐-께방(Phong Nha-Kẻ Bàng) 지역에서 대규모 촬영을 진행했다.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풍경이 스컬 아일랜드의 세계관과 맞아떨어졌다. 하롱베이의 풍경도 활용됐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 '콩 촬영지 투어'가 베트남 관광 상품으로 등장했다.
닌빈의 짱안(Tràng An) 지역 관광객이 급증했다.
베트남 정부는 이 영화를 관광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
한 편의 블록버스터가 관광지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전쟁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베트남이 세계 화면에 등장한 경우다.
전쟁의 상처가 아닌,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그 변화가 30년 사이에 일어났다.
베트남에 살면서 이 영화들을 다시 봤다.
〈플래툰〉
〈인도차이나〉
〈씨클로〉
세계 영화가 베트남을 얼마나 제한된 시각으로 다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여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쩐안흥이 베트남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을 때,
그것이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전쟁 없이 아름다운 나라.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선 가장 베트남을 잘 표현한 영화라면 단연 콰이어트 아메리칸과 그린파파야였다
베트남의 역사적 아픔과 사실적인 서정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