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식 감독과도 또 다르다
첫 아이를 낳은 기쁨이 있다. 그 이전에 아이를 한 번도 낳아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비교의 대상이 없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 준 기쁨이 딱 그것이었다.
2002년 히딩크가 한국에 준 기쁨은 분명 컸다.
하지만 한국은 그 전에도 월드컵을 경험한 나라였다.
베트남은 달랐다.
아시아 내에서도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대표팀이 2018년 AFC U-23 아시안컵 준우승,
아시안게임 4강을 해냈을 때,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역사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래서 베트남이 운 것이다.
베트남에서 'Thầy'는 선생님, 스승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인에게도 붙이기 어려운 이 존칭을 외국인이 차지했다.
현지에서 붙여준 칭호가 'Thầy Park Hang Seo',
베트남에서의 위상은 호치민 바로 아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호칭 하나가 박항서를 다른 외국인 감독들과 갈라놓는다.
그는 베트남에 이기러만 온 게 아니었다.
선수와 국민에 대한 자세, 소통과 리더십, 베트남전쟁과 승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베트남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베트남 국민에게 회자됐다.
그는 감독이기 전에 사람이었고, 그 사람됨이 먼저 전해졌다.
선수들이 '체력이 약하다'는 수십 년 된 고정관념을 그는 취임 첫 체력 테스트에서 직접 뒤집었다.
쌀국수 한 끼로 하루를 버티던 선수들의 식단을 단백질 중심으로 바꾼 것도 그였다.
작은 것부터 달랐다.
베트남 현지에 살던 한인 교민들은 이 변화를 몸으로 먼저 감지했다.
한국식당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베트남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엔 교민 식당이었던 곳이 '한국인 감독이 밥 먹는 나라의 식당'이 됐다.
한인상공회에서 국가대표팀에 별도로 박항서 감독의 사인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돌 만큼,
그 이름 석 자는 현지 한인 커뮤니티에서 하나의 자산이었다.
그것은 마케팅이 아니었다.
박항서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대한 호감으로 번진 것이었다.
감정이 먼저 움직였고, 돈은 그 다음이었다.
박카스는 2018년 6월 베트남에 론칭하면서 박항서 감독을 모델로 기용했다.
캔에 감독의 사진과 친필 사인을 새겼고, '박항서(바캉서)'와 '박카스'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이
호감도를 크게 높였다.
론칭 이후 8월 말까지 280만 개 이상 팔리며 국민 음료 반열에 올랐다.
진출 10년 만에 사상 최고 매출이었다.
현대·기아차의 점유율도 박항서 열풍을 타고 토요타를 제치며 판매량 신기록을 세웠다.
삼성전자 베트남 법인은 갤럭시 S10 플러스 '박항서 에디션' 2000개를 한정 출시했는데
한 달여 만에 완판됐다.
식품기업 대상은 박항서 감독을 광고모델로 기용한 뒤 2018년 베트남 법인 매출이 전년 대비 15% 넘게 늘었고, 이듬해에도 20% 이상 증가세를 이어갔다.
신한은행은 박항서 감독을 공식 모델로 기용하며 베트남 외국계 은행 가운데
가장 인지도 높은 브랜드로 자리를 굳혔다.
광고 한 편이 10년 치 브랜딩을 압축해 냈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박항서 효과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100조 원 이상 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숫자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이 추정치가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의 사람이 만들어낸 신뢰가 얼마나 넓은 범위까지 파급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경제 효과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있다.
베트남 선수들에게 새긴 말이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베트남 선수들이다." 이 말은 축구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우리는 약하다'고 배운 세대에게 던진 정면 반박이었다.
2018년 스즈키컵 10년 만의 우승, 2019년 동남아시안게임 60년 만의 금메달.
베트남이 60년 동안 못 이룬 것을 이 노장 한국인 감독이 함께 해냈다.
선수들은 울었고, 온 나라가 거리로 나왔다.
박항서 감독의 사례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협력이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역사가 있다. 그 무게는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의 한국인이 베트남 땅에 들어가 선수들과 먹고 자고 울며 5년을 보낸 뒤, 그 역사적 무게를 감정이 아니라 신뢰로 조금씩 바꿔놓았다. 외교관도 기업가도 아닌, 축구 감독이 해낸 일이었다.
박항서는 2023년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직도 쓰인다.
한국 식품 브랜드들은 여전히 베트남 광고모델로 박항서 감독을 찾는다.
그것이 단순한 유명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베트남에 남긴 것은 성적표가 아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처음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느꼈던 기억이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저 사람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경험이다.
첫 아이의 기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박항서가 베트남에 준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