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는 가구가 아니던데...

그렇다고 과학도 아니고... 갬성도 아니고... 결국 돌고 돌더라...

by 철없는박영감

'또닥또닥' 스마트폰 타이핑 소리가 거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들린다. 한밤중이라서 음악을 끄고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도저히 허리가 아파서 더는 못 읽겠다.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쇼핑에서 '독서 의자'를 검색한다. 낮에 거실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책 읽는 풍경'이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스트리밍해 놓고, 소파 대신 갖다 놓은 원목식탁에 앉아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타이핑 소리가 거실에서 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하고 익숙한 환경에 감각이 적응해 버렸다. 파문을 일으켜줄 돌멩이가 필요하다. 크고 파괴적인 바위가 아니라 넋 놓고 있음을 깨워줄 정도의 돌멩이 말이다. 한 일 년 정도는 직접 꾸며놓은 인테리어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세팅해 놓았다. 커피도 한잔 내려서 옆에 놓고 향을 즐기고, 꽃병을 사서 계절마다 꽃을 꽂아놓기도 하고, 식탁보를 사서 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면서 그 안에 있는 내 모습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해서 호르몬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익숙해지고 퇴색되어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자 하루종일 앉아서 책을 보던 장소가 싫증 났다. 좀이 쑤시고, 엉덩이가 배겼다. 사랑에 빠질 새로운 내 모습이 필요해졌다.

이번에는 카페 윈도 시트 느낌의 진한원목책상과 함께, 새로 배우기 시작한 통기타를 데코 해 놓고 그 안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는 모습을 세팅했다. 잠깐 쉴 때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흥얼거리고 유유자적 시간을 즐기는 콘셉트다. 살짝 발이 뜨는 의자 높이 때문에 편백나무로 제작된 발받침대도 갖다 놓고, 언젠가는 쓰겠지라는 생각에 사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전원 정리함도 세팅했다. 이곳에서 브런치도 시작됐고, 팟캐스트로 리뉴얼됐다. 하지만 좀 더 길게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던 다짐의 유효기간은 더 짧았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아팠다. 의자가 문제였다. 등받이가 너무 낮아서 허리를 제대로 받칠 수 없었고, 발이 바닥에 안 닿는 높이 때문에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넣어 앉을 수 없었다. 보기엔 좋았지만 끝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에 불편하게 지내다 보니 조금 더 편하게 사귈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이 필요해졌다.

내 이기심과 나르시시즘이 짬뽕되어 보기에도 좋고 편하기도 하면서 야생의 느낌도 조금 가미된 세팅을 했다. 이사하면서 인테리어 할 때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거야'라며 바꾼 식탁 등 아래에, 야외 카페 느낌의 접이식 테이블을 갖다 놓고, 단단한 스펀지로 만들어진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패브릭 소파를 매치했다. 예전에 숙소에서 살 때, 소파를 살 수는 없어서 구입했다가 이사 오면서 처치곤란이었던 소품인데 유용하게 활용했다. 나중에는 메모리폼 방석과 색색깔의 쿠션도 추가했다. 쿠션을 겹쳐놓고 그 위에 책을 놓고 읽으니 등도 펴지고, 식탁등이 스탠드 역할도 해줘서 책 읽기 아주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 옆에 카페테리어 식으로 찻잔, 컵 그리고 커피드립용품을 갖춰 놓으니 영락없는 홈 카페가 되어 갬성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그렇게 또 다른 풍경에 세팅된 내 모습에 취해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책들이 워낙 두꺼워서 사기에는 부담이 되었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사실 완독한 것보다 다 못 읽고 반납한 책이 더 많다. 철학공부는 시작할 때도 각오가 필요했지만, 공부하는 중에도 매일매일 각오가 필요했다. 그래도 인생책 몇 권을 여기서 만났다. 내 모습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 취기로 몇몇 책들을 완독 할 수 있었고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대충 따라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생각은 더 많아졌지만 복잡하지 않았다. 길게 쓰이던 글은 짧아졌고, 생활패턴은 단순해졌다. 먹는 양도 많이 줄어서 여기서 체중감량 최대치를 달성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왔다. 음... 초심을 찾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햇병아리 주제에 무슨 거장이라도 된 것 마냥 건방진 고백이기는 하지만, 겁 없이 글을 막 써 재끼던 어린아이 같은 동심과 순수함이 필요해졌다. 회춘하고 싶다는 느낌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만 등이 많이 굽어서 새로운 도구가 추가됐다. 독서대! 내 척추와 목건강을 지켜줄 독서대! 유튜브에서 발견한 신박한 아이템이다. 이렇게 돌고 돌아 조금 발전된 모습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다시 신선한 안정감을 줄 새로운 동굴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낮에 거실에서 블루투스 스피커에 '책 읽는 풍경' 플레이리스트를 스트리밍 하고 독서를 하다가 밤에 침대로 들어와 허리가 아파서 '독서 의자'를 검색하게 됐다. 결국 새로운 환경에 세팅된 새로운 모습이 또 필요해지게 된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발전시키게 될까 기대도 되고, 궁금하다. 요즘은 허리디스크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아침 조깅을 시작했다. 아직은 운동장 한 바퀴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헥헥 대는 저질체력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걷기라도 하면서 다섯 바퀴를 돌고 온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정체는 모르겠다. 그동안 브런치에서 라이킷 구걸하는 것 같아서 다른 작가님들 구독을 안 했는데 이제는 소통을 좀 해볼까 한다. 독서의자를 집에 들여놓게 되면 결과가 드러나려나? 아니면 의자 돌려 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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