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 안이면 다 적당한 거리던데...

초점이 맞아가다...

by 철없는박영감

나의 반성에는 공식이 있다. '내가 움직이고 바꾸면 되는데, 꼭 남들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다 기분 상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싸우고, 삐지고, 다투지... 그래 내가 바뀌어야 해' 이런 공식말이다. 반성거리를 발견하면 이린 식이었다.

"팀 공용 컴퓨터에서 엑셀파일을 연다. 마지막으로 저장한 사람이 차장님이면 보나 마나 200%로 확대되어 있을 것이고, 막내면 '한 페이지 보기'로 설정되어 있을 것이다. 확대비율 100%가 보고 싶은 정보만 한 번에 딱 잘 보여서 좋은데, 차장님은 노안이라며 100% 비율은 안 보인다고 전부 바꿔놓는다. 막내는 필요 없는 내용까지 한 번에 보겠다고 '한 페이지 보기'로 바꿔놓는데, 페이지를 표시하는 워터마크에 글자가 가린다. 속으로 'IC'를 외치며 다시 설정을 바꾼다. 처음에는 불편한지 잘 모르고 작업했는데, 재설정하기 번거롭다는 느낌이 한 번 들기 시작하자 꽤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나마 팀원이 3명이라서 다행이지 사람 수에 따라 환경이 다르게 설정된다면 이런 낭패가 없다. '같이 쓰는 파일을 왜 자기 편한 대로 바꿔놔?'라고 속으로 불평해 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차장님도, 막내도 나를 설정 바꿔놓는 파렴치한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나게 킥보드를 타고 오는 아이와 부딪혔다. 몇 미터 전부터 내가 갈 방향을 눈으로 사인을 보내며 가고 있었는데, 관심 끌려고 그랬는지 일부러 와서 부딪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화는 났지만, 뒤에서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따라오고 있어서 "조심해야지"라는 짧은 주의만 주고 지나친다. '도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킥보드를 탈 때는 주변사람 주의해서 타라고 해야 할 것 아니야? 보호장구도 없이...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라는 충고는 강력하게 속으로 외친다. 그런데 사실 아이의 시선에서는 내 허리 혹은 가슴높이 정도밖에 안 보였을 텐데, 몇 미터 전부터 신호를 보냈어도 내 눈빛은 알아차리기는 힘들었을 거다. 부딪히기 직전에 나를 발견한 아이의 표정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잠깐 길 가로 비켜주거나 아예 멀찍이 떨어졌으면 안 부딪혔을 텐데 경로변경을 최소화한다고 내가 욕심을 부렸다."


지금 보면 글을 쓴 게 아니고, 쓰기 위한 글이다. 조용히 지내면서 겪은 잔잔한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겠다고 시작했지만, 점점 그저 그런 일기가 되고 있었다. 답답해졌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불안감만 있고, 답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숲 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_저자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를 읽으며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내용을 조금 인용한다.


우리가 집착하며 좀처럼 놓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 불행감을 초래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대체로 그 자체로 보면 꽤 합리적이고 그럴싸합니다. 누군가가 뭘 '했어야 했다'라는 식이죠. 예컨대 '아빠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엄마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명색이 친구들인데 그런 건 기억했어야 하는 거 아냐?', '자식들이 좀 더 돌봐줬어야지', '상사가 그 정도는 알았어야지', '배우자가 말이나 행동을 다르게 했다면' 하는 식이지요.
이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생각은 '내가 그랬어야 했다'라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내가 달라졌어야 했는데', '내가 더 현명했어야 했는데', '내가 더 열심히 일했어야 했는데', '더 돈이 많았어야, 더 나았어야, 더 날씬했어야, 더 성숙했어야 했는데'. 이 함정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마구 날뛸 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집니다. 그리고는 말하는 겁니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어느 순간 갑자기 스마트폰에 글자가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글자크기를 키우자 화면구성이 어색해서 더 불편해졌다. 그리고 키운 화면 쓸어 올리느라 손가락이 더 아프다. 글자크기를 유지하고 잘 보이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우리가 흔히 아는 노안 포즈가 된다. 안경을 이마에 걸치고 멀찍이 팔을 뻗어 눈을 찡그린 채 스마트폰을 열심히 쳐다보는 아저씨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었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 안 보이는 글자를 보이게 하기 위해, 팔을 더 뻗어보고, 안경 도수를 높이고, 돋보기를 쓸 수도 있겠다. 그렇게 초점을 맞추면 잘 보일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 본다. 진짜 초점은 무엇일까? 꼭 스마트폰을 봐야 하나? 스마트폰 잘 보이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제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지는 것으로 시작이다. 초점이 안 맞아도 품 안에만 있으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맞춰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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